같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C 영감을 증오해요.

by 이정연


자, 이제 투병 생활은 시작되었다. 투석 생활이 시작되었으니 무얼 할까.

사실 난 완전히 똑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투석은 처음이라서, 앞으로 이식도 받고 싶어서 무얼 했냐면 신장 환자 카페에 가입했다. 이식에 대한 온갖 정보가 그 곳에는 있었더랬다. 그러나 그 카페에 나는 두어 개의 글만 쓰고 가지 않는다. 가지 않았고, 앞으로도 가지 않겠지. 같은 투석 환자끼리도 너무 상황이 다르다. 사람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다르기에, 나는 거기서 누군가와 이해의 교집합을 찾지 못했다. 사실 찾아보려는 노력도 크게 않았다.


어쩌다 카페에서 연이 닿은 또래의 투석 환자 언니와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다. 어쨌든 연령대가 높은 환자들 사이에서 흔치 않은 젊은 환자끼리였으니까 통하는 것이 많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연락을 한 지 얼마 안 된 시점부터 삐걱거렸다.

언니는 가족들과 절연한 상태였고, 3년을 사귄 남자 친구가 있었으며 직장생활 중이었다. 나보다 나이는 3살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남자 친구는 언니가 투석 중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앞으로도 말하지 않을 거라고 굳은 결심을 하는 언니의 말에서, 아 이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이구나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리고 절대 거르면 안 되는 투석을 자주 빠지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언니에게도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겠지만, 이제 막 투병생활을 시작한 스물다섯인 그 때의 내가 그런 언니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정말 아픈 티가 하나도 나지 않는, 화려한 꾸밈새를 한 언니였는데 환자로서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모습에 나는 병원에 가라고 설득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완전히 다른 사람들끼리 더 이상 이야기를 이어가는 건 서로에게 시간 낭비였다.


누군가는 저염식만이 인생의 답인 것처럼, 엄청난 저염식 식단과 관련 레시피를 올리고 그걸 칼같이 지키고 있었고 그걸 읽는 사람들은 댓글로 찬양했다. 그런데 그런 저염식을 한다는 건 돈과 정성이 엄청 많이 들어가는 일이다. 신선하고 좋은 재료로 최소한의 간을 하기 위해 늘 새로 장을 봐야 했다. 그걸 환자가 한다는 건 힘드니까 저염식의 모든 과정을 기꺼이 해 줄 가족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니면 투석받는 본인이 원래 주부여서 요리에 너무 익숙한 상태라 스스로를 챙기던가.

우리 엄마는 늘 바빴다. 지금까지도 바쁘다. 그리고 매일 장을 볼 형편도 아니다. 처음에는 어디서 저염식 얘기를 듣고서, 정말 한 두 가지라도 신경 써서 엄마가 만들어주려고 했었다. 쏘리. 너무 맛없어서 먹기가 힘들었어요. 엄마의 음식 솜씨 문제가 아니라, 아예 간을 안 하는 점이. 어차피 이미 투석을 받고 있는데(저염식 한다고 이미 다 망가진 신장에 절대적으로 이롭거나 한 건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이런 저염식 먹다가는 투석이 아니라 영양실조로 죽을 것 같았다. 엄마한테, 나는 그냥 일반식을 먹고 엄마 얼굴을 오래 보고 싶다고 말했더니 당장 저염식 만들기를 그만두었다.(엄마가 저염식 그만두었던 그 날,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났다. 진심으로.)




난 누군가에게 화를 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진짜 인간도 아니다 싶은 부류를 만났을 때는 나도 무시할 줄 안다. 화도 낼 줄 안다.

병원 환자 중에는 압도적으로 영감님들이 많다. 그리고 영감님의 대부분은 나를 좋아한다. 일단 어른들이 뭘 물으면 생글거리며 대답을 잘하니까. 그분들이 뭐라고 말해도 맞장구를 잘 친다. 게다가 귀여운 외모다!(ㅋ_ㅋ)

그런데 유재석도 안티가 있다는 걸 아는가. 내가 병원에서 영감님들의 유재석까지는 아니었지만, 안티가 생길 수 없는 상황인데도 나에게 안티가 생겼었다. 나를 향한 1인 체제의 안티클럽, C 영감. 새벽 5시부터 병원에 와서 어슬렁 거리던 자였다. 지금은 병원 문을 그렇게 일찍 열 만한 사람이 없어서 6시 반은 되어야 하지만, 그때에는 부지런한 여사님이 근무하실 때여서 늘 새벽 5시부터 병원 문이 열려 있었다. 사실 C 영감이 병원에 너무 빨리 와서 떡하니 기다리니 병원 입장에선 문을 안 열어줄 수가 없었고, 여사님은 C 영감 때문에 짜증 난다고 나에게 종종 말씀하시곤 했다. 정말 다행인 건 우리 여사님이 엄청나게 센 중년 여성 분이셔서 C 영감에게도 직접 욕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 C영감이 말 그대로 지랄 염병을 떨면, 여사님은 늘 쌍욕으로 되갚아주었다. 최고! 물론 욕먹어도 C 영감은 끊임없이 지랄 염병을 떨었지만 말이다.


처음부터 C 영감은 나에게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티내려고 하지 않아도 다 보였다.

처음 병원에 가던 때는, 아직 내가 덜 아팠을 때라서-이제 막 아프기 시작해서 덜 늙은 상태였다.- 학생으로 오인을 많이 받았다. 아주 어려 보이는 얼굴이 병원에 나타났으니 모두들 내가 몇 살인지, 어디가 아파서 신장이 망가졌는지, 부모님 중 누구에게서 유전된 병인지(3대를 거슬러 올라가도 우리 집에 신장이 안 좋은 사람은 나뿐이다.) 등 궁금해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원인 질환은 전혀 없고, 부모님이나 조부모님, 혹은 그 윗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집에는 신장 안 좋은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나는 일종의 돌연변이 환자라고 말이다.


C 영감은 새벽녘부터 아주 큰 목소리로 온 병원을 쩌렁쩌렁 울리게 하던, 작고 마른 초로의 노인이었다. 내가 관상을 좀 볼 줄 아는데, 보면 안다. 저 인간과 나는 태생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쯤은. 사실 기분 나쁜 변태상이어서 말을 섞고 싶지 않았음에도 병원에서 모난 애 취급을 받기 싫었던 나는 C 영감의 이런저런 말에도 다 대꾸를 해주곤 했다. 등신. 그게 독이 됐다.


투석 생활이 몇 년쯤 지났을 때, 나는 죽을 줄 알았던 내가 여전히 살아 있는 게 신기해서 이제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결심했다. 시내에서 매우 가까운 버스 종점인 동네에 살 때였다. 그래서 새벽 5시에 출발하는 첫차를 타기가 무척 쉬웠다. 그걸 타고 시내 중심에서 다시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병원에 도착하면 도합 30분이 조금 넘는 거리. 오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고 싶었던 나는 첫 차를 타고 병원에 가는 일상을 과감하게 선택했다. (오전에 병원 일정이 모두 끝나야 오후에 뭐든 할 게 아닌가?)

그런데 선생님들 출근은 6시 20분. 영감님들은 새벽잠이 없다. 게다가 그분들은 병원이 있는 이 동네에 사신다. 내가 다섯 시 삼사십 분쯤 되어 병원에 도착하면, 이미 예닐곱 명의 영감님들이 늘 먼저 도착해 계셨다. 처음에는 말동무도 해 드렸지만, 죽을 줄 알았던 내가 살아 있으니 이제 나는 청춘을 그런 식으로 허비할 수 없었다. 병원 도착에서 내 니들링 차례까지는 1시간 20분 정도의 기다림이 요구되었다. 그러니 그 시간에 무얼 하겠어. 공부를 해야지. 공부를 시작했다. 모바일로 강의도 들으면서 그렇게 간호사 데스크에 앉아 공부를 했다. 물론 미리 허락을 받고서.

영감님들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아이고, 공부해? 기특해라~ 열심히 해~"하고 웃으시곤 했다. 그런데 C 영감만은 유독 나를 보는 눈빛이 이상해지더니, 언제부턴가 공부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좋은 책상을 두고 나는 내 침대로 가서 환자 침대에 달린 식탁을 펼쳐놓고 거기서 힘겹게 공부를 했다. 무엇보다도 정말 심한 말을 들었던 적이 있기 때문에 나는 C 영감의 시야에서 최대한 벗어나고 싶었다.

"야, 넌 언제 병원 그만둘 거냐? 병원에서 안 보고 싶다. 딴 병원 갈 생각은 없어?"


C 영감의 그런 가시 돋친 발언 몇 차례에 나는 매번 눈물을 쏟았다. 웃긴 건 C 영감은 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병원에 있는 거의 모든 여자들에게 시비를 걸고 괴롭혔다는 것이다. 그중에서 더욱 심한 괴롭힘의 대상이 되는 것은 젊은 간호사들, 환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나였다. 그래서 우는 내가 받았던 위로도 그거였다. 정연아, 너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라 저분은 모두에게 저래.

아무리 어른이어도 그런 인간에게 인사할 만큼 나는 비위가 좋지 않다. 그때부터 나는 C 영감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게 나의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선생님은 나에게 말했다. 가족들도 C 영감을 싫어해서 병원비 내러도 잘 오질 않는다고. 그래, 나에게도 며느리가 병원에 안 온다고 욕했던 적이 있다. 본인 말에 의하면 아들은 쌍놈이고, 며느리는 나쁜 년이었다. 유일하게 C 영감의 아내만 C 영감에게 욕을 먹지 않는 가족 구성원이었는데, 그 이유는 밥을 잘하고 빨래를 잘하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C 영감의 아내는 C 영감의 빨래를 손으로 직접 세탁해주는 아주 바른 아내상에 부합한다고 영감이 지 입으로 말했다. 여편네들이 말이야. 집구석에 있으면서 기계가 왜 필요해. 뱃대지가 불러서 말이야. 밥은 밥통이 하고, 빨래는 세탁기가 하는데 주부라는 것들이 하는 일이 뭐가 있냐고. 세탁기 쓰는 건 쌍년이란다. 이게 어느 순간부터 드러난 C 영감 민낯이 뱉어내는 레퍼토리였다. 그래, 그즈음부터 내가 그 자리를 피하곤 했었지.


나중에 내가 내 침대에서 공부를 하니, C 영감은 또 어슬렁 거리고 병원내를 걸어다니는 척하며 굳이, 애써 창가에 있는 내 자리까지 행차를 해서 자꾸 눈길을 주었다. 또 무언가 시비가 걸고 싶었겠지.

이제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내가 병원을 관두던가, 네 놈이 관두던가."는 실은 마음의 소리이고. 나는 영감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걸 택했다. 영감이 이미 니들링이 끝나서 움직이지 않을 만한 시간에 내가 병원에 출근하는 것. 나는 천재다. 그 생각은 유효했.. 을 줄 알았죠? 아니. 가끔 오차가 생겨서 C 영감이 니들링 들어가기 전에 병원에 들어갔다가 마주치는 일이 잦았다. 그럼에도 나는 꿋꿋했다. C 영감을 못 본 척했다.

못 본 척 해도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 C 영감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마음이 상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C 영감이 나를 보더니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젊은것이 어른을 보고 인사도 할 줄 몰라! 못 본 척하고 말이야! ㄴㅁ;ㅐㅔ갸다ㅣㅏㅍ;ㅣㅏ너"

"저만 보면 눈을 흘기시길래 저 싫어하시는 것 같아서요!!! 제 꼴 보지 마시라고 일부러 인사 안 드린 건데요!!!!"

영감탱이가... 내가 소리 지를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어버버 하더니만 또 ㄴ;ㅔㅐㅑㅈ디,ㄴ허ㅏㅁ긷맘내ㅔ 이러면서 사라진 C 영감.



그 이후 나는 아예 시간을 바꿔서, 전보다 한 시간 더 늦게 병원에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C 영감과는 마주칠 일이 아예 사라졌다. 게다가 그 이후 더 멀리로 이사를 해서, 투석이 끝난 C 영감과 어쩌다 마주치는 일도 없었다. 한 인간의 몰골을 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내 삶의 질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그 사이에 C 영감은 자기하고 어울리던 영감님 몇 분을 괴롭혀서 병원을 옮기게 만들었고, 간호사 중 어린 누군가를 타깃으로 잡아서 엄청 괴롭히기를 반복해서 그만두게도 만들었다. 드디어 원장님에게 몇 차례 경고를 먹었다. 계속 환자와 간호사들을 못 살게 굴고, 못 다니게 만들 거면 그냥 C님을 다른 병원으로 옮기겠다고. 난 그게 화가 났다. 왜 내가 C 영감에게 당할 때 원장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지. 원장님은 여자지만 의사니까, C 영감이 절대로 덤비지 않는 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같은 병을 앓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서로를 더 잘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죽고 못 사는 것처럼 형님 아우 하던 C 영감과 다른 영감님들은, C 영감의 또라이 같음에 학을 떼고 영원히 만나지 않는 사이가 되었고. 나는 신장 환자 카페에서 그 누구와도 친구가 되지 못했으며. 오랜 투석으로 동맥류가 생겨서 흉해진 내 팔을 가장 징그러워한 것은 건강한 사람들이 아니라, 대학병원에서 만났던 복막투석을 하는 어떤 할머니 환자였다. 복막투석을 시작하기 전에 6개월 동안은 혈액 투석을 해보았다고 하는 분이, 동정맥루 재개통술을 위해 대기실에 수술복을 입고 앉아 있는 내 팔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아유 징그러워. 저 팔을 해 가지고 어떻게 살아? 나 같으면 저러고 못 살아."


자신은 흡연과 음주를 50년도 더 넘게 해서 신장이 망가진 것이 당연한데('이론상으로는' 신장에 술과 담배가 제일 해롭다고 한다. 나는 비흡연자이자 온 생애 동안 마신 것이 소주 한 잔뿐이다.) 너는 어린애가 참 안됐다고 말씀하시는 옆 침대 영감님이 계신가 하면, 너는 아파도 젊어서 좋겠다고 하는 폭력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도 같은 투석 환자들이었다. 똑같이 아픈데, 너는 젊어서 생생해 보인다. 젊으니까 치료가 끝나고 멀쩡해서 좋겠다.

과연 네 시간이 넘는 투석치료가 끝나고 멀쩡한 사람이 있을까. 나는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싫었을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는 괜찮은 척하고, 사람이 없는 비상구로 가서 쪼그려 앉아 숨을 골랐던 것이다. 치료가 끝난 나를 데리러 올 자식이나 배우자가 없어서, 혼자서 버스를 타고 집에 가야 했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컨디션 조절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밝은 표정일 수 있는 나의 젊음을 부러워했지만, 나는 그들의 온전한 젊음이 부러웠다. 나는 지금 아픈 청춘이지만, 내 나이 때의 그들은 건강했을 테니까. 건강한 청춘으로 할 수 있는 일들, 누릴 수 있는 일을 모두 누렸을 테니까. 당신은 다 해보았잖아. 아니, 내 나이의 두 배가 되는 순간까지도 그들은 그 모든 시간을 온전하게 누려왔다. 건강한 몸으로 사랑도 했고, 그래서 자식도 있잖아. 내가 멀쩡해 보인다고? 나는 당신이 누린 젊음을 하나도 누리지 못하는데?


같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건 절대로 아니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나와 너무 다른 사람이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순간이 훨씬 고맙다. 그들의 애쓰는 마음이 훨씬 나에게 진실로 와 닿는다. 네, 당신이요. 이 글을 읽고 있는 바로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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