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월 - 서른이 되기 전에 가봐야지, 유럽여행.

03 _ 서른이 되기 전에 와서 다행이다.

by 예슬

<서른이 되기 전에 와서 다행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난 생리 중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도 싫은 생리통과, 적어도 4시간에 한 번씩은 교체해야 하는 생리대 걱정을 하며 날 안타깝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부모님께 정말 감사드리는 것은 다행히도 난 생리통이 없다. 오히려 생리를 시작하는 기간에는 먹어도 살이 안 쪄 마음이 편안하고, 변비 기운이 남아있을 땐 생리혈에 있는 프로스타글란딘이 장의 수축시켜 시원한 배변활동을 돕는다. 그래서 컨디션이 평소보다 좋은 경우가 종종 있다. 살면서 생리통 진통제를 먹어본 경험은 손에 꼽히는 정도이니, 이 부분에 대해선 난 정말 행운아다.



하지만, 생리통이 없다고 낯선 곳에서 치러야 하는 생리가 반가운 건 아니다. 아랫배를 압박하는 통증만 없을 뿐이지, 시간이 지날수록 찝찝하게 올라오는 기운은 똑같이 느낀다. 게다가 이런 부분에서는 꼼꼼하지 못하고 덜렁이는 편이라, 내 가방에는 생리대가 미리 준비되어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더 많다.



그런 내가 3주밖에 안 되는 여행에서 생리를 두 번이나 했다. 서른은 아니지만 서른을 339일 정도 남긴 그날, 내 몸은 이미 서른인 것 같았다. 시간의 흐름을 앞질러 스물아홉을 통과해버린 대단한 녀석. 덕분에 나는 오랜만에 시간과의 대결에서 이긴 느낌이었다.



낯선 여행지의 일정은 비 일상성의 특별함을 선사한다. 새로운 자극은 때때로 호기심을 꺼내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게 하고, 피로가 느껴질 때면 진통효과가 있는 엔도르핀을 분출시킨다. 그래서 난 내 몸이 주는 신호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신선한 감각의 사기에 놀아났다. 영국을 건너, 스위스를 지나, 독일에서 난 두 번째 생리를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친구들 기념품으로 미리 사둔 생리대가 캐리어에 많았다는 것이다. 짧은 스위스 일정 속에서 만난 민박집 언니가 스위스와 독일 생리대를 극찬했었다. 그 언니가 추천하는 와인을 두어 병 먹은 시점부터 그녀에 대한 신뢰감이 수직 상승했기 때문에, 내 유럽여행 기념품 중 가장 자부심이 느껴지는 것은 생리대였다. 달지도 쓰지도 않아 술술 들어가던 딱 좋은 와인처럼, 생리대 역시 타지에서 두 번째 생리를 시작한 나의 서러움을 토닥토닥 달래주는 괜찮은 품질을 가지고 있었다.



내 체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매일 아침 비타민을 챙겨 먹는 것을 자주 까먹었고, 꾸준한 운동을 하기엔 조금 게을렀다. 그렇다고 규칙적인 식사를 하는 것도 아닌 와중에 내 나이 앞자리 ‘2’만 믿고 안일했다. 어쩌면 가장 큰 원인은 연극과 밤샘 연습일 것이다. 그래도 이십 대 중반까지는 괜찮았다. 먹는 만큼 찌지 않는 활동량을 가지고 있어 에너지가 좋은 편이었고, 몰아치다가도 실컷 자고 나면 회복되었다. 밤샘 연습이 주는 피곤함은, 공연이 올라가는 순간 느껴지는 쾌락을 만나면 맥도 못 추리고 사라졌다. 뇌는 적극적으로 망각 활동을 펼쳐냈다. 때로는 심장박동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리듬에 빠져, 몸이 주는 신호를 못 들은 척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한계가 왔다. 하루에 두 개 이상 약속을 잡는 것이 조금씩 힘들어졌다.



유럽 일정 대부분은 하루 다섯 개의 약속을 잡는 것과 비슷했다. 아침에 나와 버스를 타고 창문 너머 거리를 감상하거나 사람들을 관찰했다. 점심을 먹으며 사진을 찍고, 다시 오후 일정을 소화했다. 거리의 햇살이 조금씩 줄어들면 저녁을 먹거나 카페에 갔다. 마지막으로 공연을 보고 숙소에서 맥주 한잔. 게다가 20일의 일정 중 사 오일은 교통편에서 보내야 했기에, 돌아다닐 수 있는 날엔 한국에서 챙겨 온 휴족시간을 믿고 열심히 움직였다. 여행이 주는 설렘에 흠뻑 빠져 몸이 힘들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답답했나 보다. 내 몸이 생리로 신호를 보냈다. 그만 좀 혹사시켜. 너 곧 서른이야. 그 당시에 내가 바로 할 수 있는 건 독일산 발포 비타민과 마그네슘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것이었다. 스위스에서 만난 그 언니가 독일은 의약품이 좋은 나라라고 했다.



비록 생리를 두 번이나 했지만, 서른이 되기 전에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작년보다 떨어진 체력을 격하게 느꼈다. 그래서 그런지, 서른이 되고 나서 왔으면 일정을 꽉꽉 채우는 욕심을 부릴 수 없었을 것 같다. 하루에 두 편 연달아 봤던 해리포터 연극은 시도할 엄두도 못 내고, 눈으로 뒤덮인 스위스 산을 보며 탔던 스키도 두 번은 힘들었겠지. 아직은 젊음과 청춘이라는 단어를 앞세워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굳게 믿는 이십대니까, 이 스케줄이 가능했다. 혹시나 다음에 한 번 더 내 발자국이 그 땅에 닿는다면 그땐 충분히 쉬면서 여행을 할 거다. 그러려면 돈이 많거나, 욕심을 버리거나 둘 중 하나는 해야 할 것 같다. 이번 여행에서 남들은 한 달에 한 번 하는 생리를 두 번이나 했으니, 그때는 조금 더 현명하리라 믿는다. 나는 성장하는 사람이니까.



매거진의 이전글01월 - 서른이 되기 전에 가봐야지, 유럽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