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탄 오브 더 디스코 - 오리엔탈 디스코 특급
많은 음악을 자주 듣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한 번 귓가에 맴돌아버린 음악은 계속해서 찾아 듣는 경향이 있어요.
제 플레이리스트에는 오래도록 머물러있는 음악들이 있네요.
제가 그냥 흘려보내는 순간들을 대신, 기억해주는.
그래서 음악을 들으면, 다시 그 순간을 찾아내 주는.
시간이 되어 함께 흘러가버린 순간들을 기록하고 회고하며
당신의 순간도 꺼내고 싶게 만드는 글을 쓰고자 합니다.
룸메이트가 생일 선물로 받은 꿀배차를 몰래 마시고 있다. 그에게 ‘니 차를 내가 좀 마실게’라며 카톡 보내면, ‘응 그래요’라고 당연히 답변이 올 것이다. 그렇지만, 난 이상한 데서 발동되는 장난기질의 유혹에 넘어가 ‘몰래’ 마시는 쾌락을 즐기는 중이다. 아마 룸메가 없는 틈에 야금야금 하나둘씩 모르는 척 빼먹다가 티백이 하나밖에 안 남으면 더 이상 건드릴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남은 개수를 세어보니 앞으로 충분히 두 번은 더 즐거울 수 있을 것 같다.
귀여운 꿀배 일러스트가 그려진 파란 티백의 출처는 룸메이트와 나, 우리 둘의 선배이자 2년 연속 동아리 회장 직을 맡았던 그녀다. 동아리 생활을 마치 4년 내내 성적 장학금을 챙겨가는 모범생처럼 했던 터라, 선배는 졸업 이후 한동안 동아리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우린 둘 다 뜨거운 열정을 동아리에 쏟아부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후의 행보는 달랐다. 난 졸업한 지가 5년이 지나도 여전히 동아리 소식을 속속들이 알았고, 그녀는 가끔씩 내 입을 통해 전달받는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공연을 세편 정도 같이 올리고 난 이후에, 본격적으로 친해졌다. 같은 공간에서 대화를 하고 있지 않아도 전쟁을 함께 치른 군인의 전우애 같은 묘한 애정이 흘렀다. 이 기운은 졸업 후 자연스럽게 갖게 된 서로의 공백기를 무색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많이 만나야 일 년에 두 번 정도 밥을 먹거나, 산을 탔지만, 그 시간이 어색하지는 않았다. 다만, 모르는 서로의 근황과 변화한 가치관을 주고받는 시간이 조금 길어질 뿐이었다.
작년에는 그녀와 함께 새해를 맞이했다. 크리스마스에 다시 만나기 시작한 남자 친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배와 공연을 보고 산도 타고 막걸리를 마시며 사주도 봤다. 마지막엔 내 룸메이트가 돈을 벌기 위해 루돌프 머리띠를 쓰고 일하는 맥주 집에 가서 곰이 그려진 맥주를 두어 잔 마시고, 안주 서비스를 받은 뒤 뒷정리를 도왔다.
손님이 아닌 아르바이트생의 지인으로 맥주를 마시러 가면 좋은 점은, 술집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플레이리스트에 손을 댈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 손에 탁 잡히는 아이폰 5의 그립감을 느끼며 맥주와 함께 마실 음악을 선곡하는 것은 룸메의 노동으로 내가 가지게 된 소소한 행복이었다.
12월 31일이 얼마 안 남은 시간, 2017년에 마지막으로 느낄 것 같은 행복을 속에서 손가락을 굴리며 고민에 빠져있었다. 어떤 노래를 틀어야, 한 해의 마지막 순간에 감자를 튀기고 있는 이 작은 맥주집의 노동자를 위로하고, 오랜만에 함께하는 전우에게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 12월의 끝자락, 내 손가락이 돌고 돌아 선택한 곡은 술탄 오브 더 디스코의 <오리엔탈 디스코 특급>이었다.
알면 알수록 신비한 공간 속에
그들이 심어 놓은 유혹의 마술
알게 모르게 빠져들어 잃어버린
감각과 이성은 어디로 갔을까
술탄 오브 더 디스코 <오리엔탈 디스코 특급 중>
어떤 노래는 가사가 아니라, 리듬과 템포 혹은 멜로디로 기억된다. 이 노래가 그렇다. 아무리 들어도 가사를 직접 눈으로 보지 않는 이상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확실하게 장담할 수 있는 건, 추워서 움츠리고 싶은 몸의 감각도 깨워내는 비트를 가지고 있는 곡이라는 것이다. 듣는 동안만큼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흡입력을 가졌다고 할까. 마치 차분하지 않은 명상을 하는 것처럼, 머릿속의 딴생각을 없애고 박자에 몰입시킨다. 최근에 배우고 있는 요가 용어 중에 ‘삼매’라는 것이 있는데,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없어지고 그 대상만 남을 상태를 말한다. 나는 삼매 상태가 이 노래에 막춤을 추고 있는 순간과 비슷할 거라고 추측한다.
역시나 노래가 시작되자 맥주잔을 잡은 손가락부터 리듬을 탔다. 옴짝달싹하는 발끝이 엉덩이도 같이 움직이고 싶어 했다. 잠시 후, 손님들이 떠나고 남은 자리에서 우리는 뒷정리를 하다가 빗자루와 행주를 들고 4분 26초간 삼매 상태에 빠져들었다. 삼매는 마음을 정화하는 8가지 방법 중 마지막 단계인데, 노래가 끝나고 남은 자리에 흐르는 땀과 거친 호흡이 뒤엉켜 쉬어버린 목소리가 들렸던 걸 보니 마음이 격하게 정화되었다. 우린 인스타그램에는 올릴 수 없는 막춤 작렬 영상도 몇 개씩 찍으며, 새해를 함께 맞았다.
그로부터, 일 년 하고 한 달이 지나간다. 인간의 뇌는 무슨 작용을 하는지 지금 느껴지는 시간은 길고, 지나간 한 달은 짧다. 휴대폰 시계를 본 지 2분도 안 지났는데 나는 또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런데, 서른이 된지는 벌써 한 달이 지나간다. 29일 동안 뭘 했지? 오늘 아침도 요가를 갔고, 빨래를 했다. 내 계획은 늘 많기에, 이루지 못한 것들도 이만큼이나 있구나. 몰래 맡는 꿀배향과 함께 알게 모르게 지나가버린 1월을 회고한다.
꿀배차의 출처인 선배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했다. 덕분에 나도 잘 먹고 있다고. 짧은 근황을 나누던 중, ‘역시 사람은 대화를 하지 않고는 서로를 알 수 없는 거구나’라는 말이 나왔다. 기분이 이상했다. 전우애가 넘치는 과거를 함께했지만,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계속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우린 저녁에 전화를 한 통하고, 조만간 한 번 보기로 했다.
서울에 온 지 5년, 지리적으로 멀어진 인간관계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직은 조금 힘들다. 생각을 살짝만 바꾸면 내 삶의 한 순간에 그 사람이 전우로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을 텐데, 난 욕심이 많아서 순간을 늘리고 늘려서 미래까지 가져가고 싶어 한다. 돌이켜보면, 그래서 연극도 힘들었다. 공연이 끝나면, 같이 공연을 했던 사람들도 다 과거로 가버린다. 나에게 다가올 미래가 많은 건 알지만, 지나간 과거 또한 적지 않게 쌓여가니 점점 힘들었다.
선배에게 처음으로 난 요즘 ‘연극을 계속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한다고 말했다. 다행히 대화의 화두가 빠르게 전환되어 그 진지한 고민에 우린 오래 머물지 않았다. 아마 선배가 진지하게 답변을 했으면 난 눈물이 왈칵 쏟아졌을 것이다. 왜냐면, 난 아직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너무 슬프고 부끄럽다. 하지만 동시에 이 마음을 말할 수 있는 선배가 있다는 게 감사하다. 그리고 그 관계를 유지하도록 애쓰고 싶은 의지가 생긴다는 것도 감사하다.
내가 백 살까지 산다고 가정했을 때 마주하게 된 백번의 12월 31일 중 한 번을 함께 보낸 선배와 진하게 통화를 하고 나면 잠이 잘 올 것 같다. 그리고 나한테도 꿀배차를 선물로 보내달라고 애교가 섞인 투정을 부려야겠다. 한 달 전, 내 생일에는 축하한다는 말만 해줬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