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석 - 나의 사랑 수정
많은 음악을 자주 듣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한 번 귓가에 맴돌아버린 음악은 계속해서 찾아 듣는 경향이 있어요.
제 플레이리스트에는 오래도록 머물러있는 음악들이 있네요.
제가 그냥 흘려보내는 순간들을 대신, 기억해주는.
그래서 음악을 들으면, 다시 그 순간을 찾아내 주는.
시간이 되어 함께 흘러가버린 순간들을 기록하고 회고하며
당신의 순간도 꺼내고 싶게 만드는 글을 쓰고자 합니다.
꿈자리가 좋았다. 아니, 실은 정말 무서웠다. 잠을 깬 직후에도 떨림이 남아 두 손을 꼭 쥔 채로 천장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무슨 꿈에 그렇게 혼났는지, 평소에는 오래 버티기 어려운 근력운동을 주먹 쥐는데 다 쏟아부었다. 6시를 말하는 알람이 울렸다. 덕분에 잠자리에 머물던 두려움의 여운이 톡 깨졌다. 오늘만큼은 매일 아침 나를 시험대에 오르게 하는 모닝콜이 반가웠다.
옛말에, 꿈은 반대라고 했다. 나는 알람을 끄자마자 바로 해몽을 검색했다. 대박. 무의식 세계에 사로잡혔던 공포심의 크기만큼, 현실에선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생긴다는 길조란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 없는 한 마디가 이렇게 또 하루의 시작을 특별한 이벤트로 만든다.
내 인생, 이 정도 스케일의 꿈을 꾼 적이 있던가? 들떠버린 마음은 말릴 새도 없이 룸메이트와 몇몇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다. 하지만, 꿈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뱉으면 효력이 사라진다는 말에 구체적인 묘사는 내 머릿속에만 남겨두기로 했다. 연초에 정재승 박사의 '열두 발자국'을 읽고 더 이상 사주와 타로는 안 보기로 했으나, 이 정도 미신에 기대는 건 괜찮을 것 같았다.
생각의 힘은 대단하다. 겨울 햇살이 이렇게 따뜻했던가? 오늘따라 거울에 비치는 요가 동작도 나 자신에게 반할 만큼 예술적이다. 든든한 꿈의 약빨이 떨어질 만한 오후쯤, 연락이 한 통 왔다. 와우. 떨어졌던 워크숍에 공석이 나서 내 기회가 생겼단다. 진짜 길몽이었나 보다. 꿈의 유통기한이 지나기 전에 로또도 한 장 사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복권은 현금으로 결제해야 한다는 사실도 몰랐다. 꿈도 좋다는데, 여기에 초심자의 행운까지 겹쳐서 진짜 1등에 당첨되면 어떡하지? 난 남은 일주일 동안 최고로 착하게 살 거다. 혹시나 그 작은 종이를 잃어버릴까 싶어 사진도 두 장이나 찍어두었다. 이렇게 혼자서 오두방정을 떨고 있는데, 여느 날처럼 공간을 채워주던 배경음악이 갑자기 귓가에 꽂혔다.
조금만 더 기다릴까
잠시 후면 지나갈 텐데
맴도는 멜로디가 머금고 있는 순간이 있었나 생각해보니, 난 복권 초심자가 아니었다. 삼 년 전 라식수술 후 서비스로 로또 한 장을 선물 받은 적이 있었다. 맞다. 그때도 그 작은 종이가 준 설렘을 수술 후 통증을 완화시키는데 썼었지. 그 병원은 로또 서비스 외에도, 의사 선생님과 연예인처럼 인증샷을 찍고, 수술실에선 긴장을 풀어준다며 환자가 선곡하는 노래도 틀어주었다. 당시 수술이 안 아프게 빨리 끝나길 바라며, 내가 선택한 노래가 지금 귓가에 들리는 이 곡이다.
하염없이 기다리다
우연인척 그녀를 만나
해맑은 그 미소 눈이 부셔
나의 사랑 수정
조정석, <나의 사랑 수정> 중
그 당시, 이 곡을 틀어달라고 요청했던 이유는 모르겠다. 그저 기억하는 건 이 노래는 오랜 후배이자, 누구보다 내가 서른이 되길 기다렸다던 내 나이 많은 친구가 좋아했던 곡이다. 대중가요가 아닌, 뮤지컬 곡으로 조정석 배우가 지금보다 조금 덜 유명할 때 불렀다. 기수제가 있는 우리 동아리에 늦깎이 막내로 들어온 그는 몇 해 동안 연기 입시를 준비하며 이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했다. 가사 중 ‘나의 사랑 수정’을 ‘수정’ 대신 다른 이름으로 바꾸며 써먹었다는 유용한 그의 꿀팁이 얼핏 기억났다.
방금까지 로또 종이를 보고 있다가 라식수술을 거쳐 그가 생각나다니, 생각의 꼬리는 정말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 어느덧, 들리는 가사에 흥얼거리던 그의 목소리가 덧입혀졌다. 그가 너무 보고 싶어 졌다. 하지만, 지금은 새로운 목표를 위해 잠시 세상과 단절해있어 불러낼 수가 없다. 그저 응원하는 마음만 텔레파시로 보낼 수밖에.
한때는 시시콜콜한 일상을 공유하는 게 당연했고, 큰 결정의 기로에선 넌지시 의견을 물어봤다. 그러면 마치 내 생각을 읽어내듯이 그는 내 마음이 숨겨둔 걸 꺼내 주곤 했다. 오글거리는 표현을 낭만적으로 구사하길 즐겼고, 근사 하단 말을 아끼는 사람에겐 인사말처럼 붙여줬다. 그가 준 마지막 편지엔 훌쩍 다가온 서른에 어쩔 줄 몰라하는 나 자신이 민망할 만큼, 나의 행복을 '응원'이 아니라 '염원'한다는 글귀가 날 울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밟아야 하는 서른의 계단에 먼저 찍혀있을 그의 발자국이 든든했다. 내가 로또를 살만큼 좋은 꿈을 꿔서 진짜로 복권을 샀다고 말하면 우리는 어떤 대화를 했을까? 매번 쉽게 끝내기가 아쉬워, 점점 어려워진 우리의 수다가 그립다. 오늘 밤은 로또를 살만큼 좋은 꿈 대신, 그가 나와 줬으면 좋겠다.
어쩌면, 난 길어지는 공백이 우리의 과거를 희미하게 만드는 게 두려운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알고 있다.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는 날엔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샤르르 얼린 레몬이 바닥에 깔린 맥주 한 잔에 낭만을 담아 감성적인 시를 쓸 것이란 것을. 마음을 바꿔야겠다. 일등에 당첨될지도 모를 그 행운을 그에게 보낸다. 빨리 시험을 끝내고 내 일상으로 다시 복귀해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