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_모든 일은 흔적을 남긴다
'서른에 머리 박치기하는 자세 스무번째 이야기'
<모든 일은 흔적을 남긴다>
독립출판물 유통을 앞두고, 집 근처 독립서점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어떤 책들이 있는지 둘러보다가, 책방 사장님과 한마디라도 해보고 싶은 마음에, 타이밍을 엿보며 계산대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딱히 내가 그를 이상하게 쳐다본 건 아니지만, 심히 긴장한 터라 마음이 울렁울렁 요동쳤다. 사장님과 눈이 마주치려는 찰나, 꿈틀거림을 잠재우려고 얼떨결에 눈에 보이는 책자를 아무거나 하나 잡았다. 지역 문화 소식지였다. 몇 장을 대충 넘기다가, 낯익은 사진을 하나 발견했다. 지난여름 내가 ‘열린옷장’에서 열심히 만들었던, 로비 게시물이 찍힌 사진과 글이었다. 이걸 이렇게 만날 줄이야.
입사 당시, 정장을 대여하러 온 고객이 대기하는 로비 벽은 텅 비어있었다. 성수기를 앞두고 갑작스럽게 공간 확장을 하면서, 미처 게시물 작업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방치된 것이었다. 우리 회사는 옷과 함께 이야기를 공유하는 옷장인데, 어느 순간 정장 대여만 하는 것 같아 그게 늘 마음에 걸렸다. 옷 한 벌에 떠오르는 여러 얼굴과 이야기를 나만 알고 있는 느낌이었달까? 의미 있는 일은 나눌수록 배가 되지 않는가?
예를 들면, 대여자는 면접에서 마지막 한 마디를 앞두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릴 수도 있다. 눈앞에는 대답을 기다리는 면접관의 무표정, 턱턱 숨이 막혀오는 면접장의 공기, 손바닥과 손가락 마디 사이에는 식은땀이 고이기 시작한다. 끈적끈적한 느낌을 닦으려고 치마나 바짓자락을 움켜쥐는 찰나, 그 정장에 담긴 이야기가 생각나는 것이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셨을 사회 선배가 기증한 정장을 빌려 면접을 보러 왔습니다. 따뜻함이 느껴지는 응원 메시지와 기운을 받고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라고 서론을 펼치며 본론을 생각할 시간을 벌 수도 있다. 우린 그런 기회가 생길 가능성을 많이 열어두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고객들이 대여하는 정장의 발자취를 알고 면접장에 갈 수 있도록, 로비 벽면을 하루라도 빨리 채울 수 있길 바랐다.
어느덧, 성수기가 끝나고 비수기가 시작되었다. 드디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동료와 함께 작업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우린, 일주일에 한 번씩 야금야금 로비 벽을 꾸미기 시작했다. 정장이 기증되는 방법부터, 기증된 정장과 함께 오는 기증편지 활용법, 응원의 기증편지를 받은 대여자가 쓰는 대여편지, 대여편지가 다시 기증자에게 가는 뉴스레터까지. 옷과 함께 이야기가 흐르는 길을 만들었다. 한 달 뒤, 로비 벽면을 스토리 텔링이 가득 찬 게시물로 채울 수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시물이 그 작은 책자 속에 있었다. 이걸 이렇게 만날 줄이야.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다. 나는 그 기사를 매개체로 책방 사장님과 대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넌지시 지금 독립출판물을 만든다며, 이 책방에 입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예비 ‘작가님’이냐며, 친절하게 입고 메일 주소와 절차를 알려주었다. 그날 밤, 나는 아직 ‘작가님’은 아니지만, 혼자 설레발을 치며 기쁜 마음으로 메일을 보냈다. 일주일 뒤, 답장이 왔다. 이럴 수가. 입고를 거절당했다.분명 그날 분위기는 꽤 화기애애했다. 꽤 자연스럽게 내 책을 어필했던 것 같은데... 그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나 보다. 그래도 한 가지 알게 된 것은, 내가 지금 하는 모든 일은 다 각각의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스물아홉 여름, 내가 열심히 만들었던 게시물을 서른의 봄에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만났다. 이처럼 이 글 또한 어떤 곳에서 어떤 흔적으로 나와 다시 만날지 모른다. 다만 작은 바람을 하나 덧붙인다면, 언젠가 꼭 그 서점에 내 책의 흔적을 찾고 싶다. 제일 잘 보이는 자리에 조명을 잘 받은 상태로 잘 놓여있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