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시경 - 우린 제법 잘 어울려요
혓바닥을 내밀기 시작한 빨래통이 눈에 보였다. 세탁기를 돌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하루만 더 있다간 내장까지 튀어나올 기세다. 게다가 흐린 날씨를 핑계로 떠밀 수 있었던 어제와 달리 쨍쨍한 하늘이, 오늘은 미루지 말고 그냥 빨래를 돌리라고 말한다. 귀찮음이 마지막 발악을 하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널브러진 옷더미를 뒤적거렸다. 이거 참, 수건 몇 장을 빼고는 대부분 부피가 큰 것이 딱 봐도 동생 것이다. 아니, 후드티가 속옷도 아니고, 왜 한 번만 입고 빨래통에 내던지는 건가? 볼펜 똥이라도 묻었나? 정작 내 옷은 두 개밖에 안 된다. 세탁기 앞에 빨래 더미를 들고 서 있어야 하는 사람이 나인 게 억울해졌다. 찬에게 빨래 너는 것만이라도 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시험 기간이다.
저기 그대가 보이네요
오늘도 같은 시간이죠
언제나 조금 젖은 머리로 날 스쳐가죠
시험 기간이 되면 그는 언제나 조금 젖은 머리로 설거지를 하는, 혹은 빨래를 너는, 혹은 청소기를 돌리는, 혹은 쓰레기를 정리하는, 나를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같은 배역을 맡은 더블 캐스팅 배우처럼, 과거의 내가 엄마 앞에서 둘러대던 대사를 똑같이 읊는다. 공부 외 다른 활동을 하면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양심에 가책이 매우 깊게 느껴지고, 심지어는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불안하다고. 남매라고 이런 것도 닮는 것인가? 나는 조용히 이 기간이 지나가길 바랄 뿐이다.
빨래 더미 앞에서 몸만 쏙 빠져나간 그의 허물을 바라보고 있으니, 노동요가 필요했다. 더듬더듬 플레이리스트를 뒤적거렸다. 반가운 노래 제목 언저리에 손가락이 기웃거리자마자 피식거리는 웃음이 튀어나왔다.
성시경, 2집 수록곡 ‘우린 제법 잘 어울려요’
어릴 때 우리는 좋아하는 것이 꽤 비슷한 편이었다. 드문드문 생각나는 기억을 더듬어보면, 둘 다 겨울에는 해리포터 내복을 꺼내 입었고, 색깔은 다르나 디자인이 똑같은 야상점퍼도 있었고, 발 사이즈가 다른 롤러브레이드도 각각 있었다. 그와 중에 우리가 함께 꽂힌 노래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우린 제법 잘 어울려요’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해맑게 웃는 구혜선의 미소에 빠져 뮤직비디오가 나오는 텔레비전 앞에 둘 다 멍하니 서 있었던 모습이 생각난다. 어쩌면 우리의 마음을 앗아간 예쁜 그녀가 배경처럼 등장하는 성시경과 너무나도 안 어울려서 더 기억에 남았나 싶기도 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와 내가 성시경을 화두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마지막 꼬리에는 이 노래가 꼭 튀어나온다. 기억 저편에서 희미하게 뮤직비디오를 떠올리고, 제멋대로 기억하는 가사를 입술로 가져온다. 흥얼거리는 리듬에 맞춰 팔다리를 흐느적거리다 망가진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웃음이 터진다.
정말 서두르진 않을 거예요
한 걸음 한 걸음씩
그대가 나를 느끼게
성시경 <우린 제법 잘 어울려요> 중
어느 순간부터 엄마가 고구마와 감자, 두 종류를 다 삶아서 접시에 올려주실 만큼 남매의 취향은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고구마가 내 입안으로, 감자가 동생 위장에 들어가 있어도, 여전히 우린 같은 노래에 같은 추억을 가지고 똑같이 반응한다. 그리고 7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마주한 시험 기간 앞에서도 같은 변명을 구사했다. 게다가 빨래 더미를 보고 있으니, 그가 한 번 입고 던져놓은 후드티는 내게도 제법 잘 어울렸던 것 같다.
부모님의 울타리 안에서 매일매일 붙어있는 어린 시절이 지나고도 끈끈한 어른 형제 사이는 정말 감사할 일이다. 찬은 내가 서른 인생 동안 손꼽을 정도로 겪어본 위경련을 일주일에 삼일 이상 앓도록 만들어준 전 남자 친구를 나 대신 격하게 저주해주기도 하고, 갑작스러운 진통에 침대 위를 뒹굴기 시작하면 따뜻한 물 한잔과 함께 위장약 두 알을 손바닥 위에 올려주기도 한다. 때때로 둘이 찍은 사진을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해두면 연인으로 오해를 불러일으켜 들어 올 소개팅이 무산되기도 한다.
비록 지금은 당장 내가 널어야 할 그의 옷가지가 눈에 더 들어오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친구나 연인처럼 직접 선택하고 종료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이 참 좋다. 막 세탁기에서 꺼낸 구겨진 후드티가 잠옷이 될 때까지 싸워도 내가 누나고 그가 동생이고 우리가 남매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내일이면 다시 또 팔꿈치 어딘가에 볼펜 똥이 스윽 묻어있거나 허겁지겁 먹은 김치찌개 국물이 가슴 언저리에 배어있는 티셔츠가 빨래통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그럼 나는 또 괜히 억울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시험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나는 조용히 빨래를 널겠다. 혹시나 괜히 억울한 마음이 생기면, 내 묵은 옷가지를 더 넣어서라도 기분 좋게 세탁기를 돌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