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아이드소울 - 오래도록 고맙도록
비가 내리는 아침이었다. 젖어도 티가 안 나는 까만 바지를 입고, 빗물이 양말을 적실 위험이 적은 가죽구두를 신고, 잃어버려도 걱정 없을 저렴한 편의점 투명우산을 손에 들었다. 준비를 마친 후, 길을 나섰다. 아스팔트 바닥에 숨겨진 굴곡을 따라 물웅덩이가 보였다. 걷다 보니 맑은 날에는 아무 생각 없이 디뎠던 자리를 무심코 피하고 있었다. 물이 많은 곳만 골라 밟으며 툭 튀는 물방울에 씨익 웃었던 기억도 있는데, 어느새 물가에 신발 밑창을 살짝 갖다 대는 데도 용기가 필요해진다.
비가 오면 손잡고 걷기를 좋아하던 길
자그마한 우산 속엔 그대 웃음이
비가 오면 향기가 짙어진 머리카락이
눈감아도 그대인 걸 알게 해
대학교 일 학년, 삼월의 봄비가 내리는 날은 모든 시작을 머금은 설렘이 빗방울까지 담겨 우산을 톡톡 쳐댔다. 그때가 마침 공강 시간이었는지, 수업이 끝나고 아르바이트를 가기 전이였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이제 막 친해진 우리는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시답잖은 장난만 치다가 결국엔 어색한 침묵을 맞이했다. 빗소리 말고는 그와 내 숨소리만 들렸다. 각자 쓰고 있던 우산 속에 얼굴을 숨겨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나는 삐져나오는 어색함을 감추려 입꼬리만 최대한 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오가는 말 한마디 없이 열심히 디뎌낸 발걸음이 스물한 개쯤 될 때였을까? 빗소리를 뚫고 그의 목소리가 귓가로 들어왔다. ‘브라운아이드소울의 오래도록 고맙도록’이라는 노래를 아냐며, 나를 보니 그 노래가 생각난다고 들어보라고 추천해주었다. 우리 사이를 촉촉하게 적시는 비 때문에 그런 말을 했는지, 우리 사이에 흐르는 어색함을 깨보고 싶어서 그런 말을 했는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뱉어버린 그런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산 속에 파고든 작은 한 마디에 내 마음이 동했다.
누군가 나를 보고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고 말해준 것도 기분이 좋았는데, 들어보니 가사와 멜로디까지 꽤 낭만적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갑작스럽게 일어날지도 모르는 어떤 일에 관한 기대감과 가능성을 무한정 생각하며, 며칠을 오르락내리락 애끓는 마음과 살았을지도 모른다. 한 가지 신기한 건, 당시의 난 내게 다가올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꿈틀거리는 감정이 지나가는 자리에 충실하게 흠뻑 젖어 들어갔을 뿐이다. 나중은 미래의 나에게 시원하게 맡길 수 있는 믿음이 있었다.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과거의 나에게 믿음을 넘겨받은 오늘의 나는 미안하게도 내게 잠재된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그때와 달라진 건 오히려 더 많은 경험과 시간이 쌓였다는 것뿐인데, 왜 두려움만 더 커진 걸까. 경험이 부족하니 실수를 하는 것이 당연하고,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도 큰 기대를 심을 수 있었던 시절이 그립다. 비 오는 날에는 바지 아랫단이 젖는 것이 당연하다. 오늘 아침은 물웅덩이에 과감하게 발을 내디딜 수 있는 내가 필요하다.
왜 그때 우린 힘겨워했는지
미리 염려하고 두려워했는지
시간 흘러가면 깨끗하게 씻겨
아름다운 기억들만 지친 어깨를 다독이는
삶의 노래로 남을 텐데
브라운아이즈소울 <오래도록 고맙도록>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