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콜리너마저 - 유자차
많은 음악을 자주 듣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한 번 귓가에 맴돌아버린 음악은 계속해서 찾아 듣는 경향이 있어요.
제 플레이리스트에는 오래도록 머물러있는 음악들이 있네요.
제가 그냥 흘려보내는 순간들을 대신, 기억해주는.
그래서 음악을 들으면, 다시 그 순간을 찾아내 주는.
시간이 되어 함께 흘러가버린 순간들을 기록하고 회고하며
당신의 순간도 꺼내고 싶게 만드는 글을 쓰고자 합니다.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있었다. 반쯤 마시고 나니 미지근한 것이 뜨거운 물을 더 부을까 고민되었다. 물을 더하면 온도는 올라가겠지만, 밍밍한 보리차가 된 커피를 마시게 될 것 같았다. 갈팡질팡 갈등하는 찰나를 뚫고 오후 약속이 생각났다. 이런,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웬만하면 커피는 하루 한 잔만 마신다. 그 이상 마시면 눈만 멀뚱멀뚱 잠이 안 오거나, 속이 쓰리다. 게다가 단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아메리카노를 제외하면 딱히 시킬 메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나마 무난한 건 허브티? 꼬리를 물고 물며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빼죽 튀어나온 입술이 느껴진다. 어린애 같다는 생각에 괜히 혼자 웃다가 헛기침을 두어 번했다. 목이 칼칼하다. 감기가 오려나? 그럼 ‘유자차’다.
감기와 함께 음료를 고를 때면, 여러 가지를 고민하다가도 결국엔 유자차다. 입속에 퍼지는 새콤함이 딱 기분 좋은 달달함을 전해주고, 믿거나 말거나 들어있다는 비타민이 감기를 지켜주겠지. 게다가 카페에서는 유자청을 듬뿍 넣어주기 때문에, 반쯤 마시고 뜨거운 물을 한 번 더 부으면 딱 내 입맛에 맞는 적정한 달콤 농도를 만날 수 있다. 유자차를 마시는 거로 생각을 마무리하려 했는데, 또 다른 유자차가 하나 떠올랐다.
내 인생 첫 연극의 수록곡. 브로콜리너마저, <유자차>
‘자는 얼굴은 조용하니 예쁘네’라는 마지막 대사와 함께 전주가 흘렀다. 뒤이어, 진한 유자차 빛 조명이 눈을 꼭 감고 있는 내 얼굴에 따뜻하게 닿으면 상대 배역이 노래를 시작했다.
바닥에 남은 차가운 껍질에 뜨거운 눈물을 부어
그만큼 달콤하지는 않지만 울지 않을 수 있어
온기가 필요했잖아, 이제는 지친 마음을 쉬어
이 차를 다 마시고 봄날으로 가자
8년이 지나도 장면과 대사가 귓가에 생생하게 머물러있는 걸 보니, 내 파트너가 그때는 연기를 좀 잘했나 보다. 더불어 커피를 마시다 생각난 이 노래는 그날의 기억을 온전히 흡수하고 있었다. 눈부시게 따뜻한 조명, 관객의 박수 소리에 터질 것 같던 가슴의 전율. 전주만 들어도 다시 느껴지는 감각은 강렬하게 남아있다. 마음속으로만 흠모하던 연극을 ‘좋아한다고, 하고 싶다고’ 내뱉을 수 있는 용기를 만들어준 순간. 이 노래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언제든지 불러올 수 있는 나의 첫 공연이다.
우리 좋았던 날들의 기억을 설탕에 켜켜이 묻어
언젠가 문득 너무 힘들 때면 꺼내어 볼 수 있게
그때는 좋았었잖아, 지금은 뭐가 또 달라졌지
동아리를 졸업한 지도 5년이 지났고, 나의 기억 또한 많이 미화됐을 것이다. 재밌는 일만 있었을 것 같지 않아 가만히 더 생각해보았다. 외워지지 않는 대사에 밑줄이 가득 너덜너덜한 대본도 떠오르고,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몰라 연출 선배가 시키는 대로만 하던 선배 바라기 로봇도 기억난다. 하지만, 뜨거운 열정이 있었고 결과가 주는 벅참은 그 이상이었다. 과정에서 겪었던 모든 일에 행복하다는 형용사를 붙이고 싶은 기억이 매우 생생해서, 난 연극을 계속해왔던 것 같다. 반쯤 마시고 다시 뜨거운 물을 부어 먹으면 적당한 농도가 되는 유자차처럼, 나의 초심은 한 번씩 골 때리는 현실을 살아낼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나는 일 년에 두 번 동아리 정기공연을 간다. 내가 공연을 올렸던 무대에 서 있는 후배들을 보며 연극을 했던 이십 대 초반의 나와 만난다. 돌아오는 길엔 늘 행복이 내 팔짱을 끼고 함께 걷는다. 과거를 소중하게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현재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감사한 능력이라는 사실을 난 알고 있다. 오늘 유자차를 마시러 가는 길에 유자차를 들어야겠다. 나에게는 마실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두 가지 유자차가 있다. 그리고 나만 가지고 있는 특별한 유자차가 하나 더 있다. 세 개의 유자차. 생각해보니 나는 유자차 부자다. 감기 기운이 시작된 오늘 하루에 이 기억으로 설탕을 켜켜이 묻혀둬야겠다. 필요할 때 언제든 뜨거운 물을 부어 마실 수 있도록.
이 차를 다 마시고 봄날으로 가자
브로콜리너마저, <유자차>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