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을 많이 만들어 놓는 이유랄까?
어릴 때부터 그랬다. 이유는 모르지만, 어쩜 그리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는지. 피아노, 바이올린, 합창단, 발레, 댄스, 수영, 태권도, 요가, 미술, 만화 그리기, 건축모형 만들기, 미싱... (이 모든 걸 다 해봤다) 방학이면 기다렸다는 듯 이거하고 싶다 저거 하고 싶다 말하며 한 달 치 가계부를 들여다보는 엄마의 가슴을 졸이게 만들었던 꼬마가 바로 나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생이 될 무렵부터 백화점에서 일하기 시작하셨는데, 아마도 이것저것 하고싶어하는 나의 꿈과 희망을 키워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동네 곳곳에 새로 생기는 학원은 물론이고, 신문에 끼워진 전단지 속 다달이 바뀌는 백화점 문화센터 시간표를 초등학생이 다 꿰고 있었으니까.
뭐 그렇게 하고 싶은 게 많고, 뭐 그렇게 다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까? 그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에게는 영재교육을 받을 만큼의 유별난 재능은 없었지만, 성공과 실패를 적절하게 맛볼만한 적당한 잔재주가 있었다. 그것도 쫌 많이. 무수한 것들이 내 눈엔 흥미롭게 들어왔고 내 세상엔 재밌고 즐거운 것들이 가득했다.
하고 싶은 것도 해본 것도 많은 나는, 애써서 힘들게 해내는 노력보단 약간의 행운을 기대하며 즐기는 상태를 좋아했다.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내가 가진 것은 재능의 영역이 아닌 잔재주의 영역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던 게 아닐까 싶다. 아주 잘할 때보단 적당히 잘 해낼 때, 더 행복하단 인생의 비밀을 조금 일찍 발견하면서 나는 뭔가를 조금 더 쉽게 좋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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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외로움이 찾아오거나, 기분이 좋지 않거나, 힘들단 말을 내뱉고 싶어질 때면, 좋아하는 것들이 잔뜩 저장돼 있는 나의 SNS를 들여다본다. 차곡차곡 담아둔 기록을 보며, 피식 웃다 잠시 뿌듯해했다 내가 또 이런 성취를 할 수 있을까 걱정한다. 이내 이런 과거를 살았는데 내 미래는 당연히 더 재밌을거라 코웃음치며 내가 보낸 시간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나를 만난다. 외로움은 채워지고, 힘들다는 말의 위에는 잘 살아왔다는 기분이 쌓이며 괜찮을 것 같은 의지가 조금씩 느껴진다. 그러다 보면, 살아온 시간 속에
있었던, 있는, 있게 될 나를
사랑할 힘이 생긴다.
물론 좋아하는 것들이 언제나 나를 보편적인 좋은 상태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좋아한다는 감정이 주인이 되어 '좋은 상태에 있어야 해!'라는 생각 속에 가둬 버리기도 한다. 이를테면, 속이 곪아가는데도 즉각적으로 느끼는 괴로움을 견디다 보면 괜찮아질 거라는 자기 최면이 압박처럼 들어오기도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현재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싶지 않은 구린 상태도 만난다. 관점에 따라 나는 결국 좋아하는 것에 의지하는 삶을 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뒤죽박죽 주객전도 된 상태 속에서 몇 차례 헤매다 보니, 요즘 내가 깨달은 또 한 가지는 좋아하는 감정이 변하는 걸 두려워하면 안 되겠다는 것이다.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족되었던 삶이 가난해지고 지루함과 반복으로 바뀔 땐, 스스로에게 질문이 필요한 시점이다. 좋아했던 이유가 흐릿해져, 망각 상태에 빠져 있음이 분명할테니 말이다. 그럴 때는 선명하던 에너지를 잃어버린채 무채색으로 결여된 힘이 나에게 다시 올 수 있도록 알려줘야한다. 잊었던 감정의 골짜기를 거슬러 헤쳐보고, 취향이 바뀌어버린 까닭을 골똘히 생각한다. 한차례 불편함을 겪고나면 나의 즐거움들은 조금 더 진하고 강렬해진다. 한숨으로 가득 내쉬었던 하루을 다시 설레는 들숨으로 채울 수 있다. 그렇게 좋아하는 것들과 소소한 루틴을 만들며 동고동락 건강하게 사는 삶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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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새로운 이벤트, 그걸 잔뜩 기록해둔 나의 SNS, 낯가림 있는 내가 용기 내 말 걸었을 때 기다렸다는 듯 밝게 웃어주는 낯선이, 그러다 나도 모르게 내 삶에 스며들어버린 누군가, 그 사람에게 영향을 받아 새롭게 또 좋아지는 것들, 유독 수직수평을 잘 맞춰 찍은 풍경, 피사체가 되어 카메라 앞에 서는 시간, 순간포착한 표정이 생동감 있게 살아있는 인물사진, 그런 사진이 너무 많아 저장공간이 부족한 내 핸드폰, 그 안에서 심심하지 않게 나랑 대화를 주고받아주는 사람들, 응어리진 마음의 실마리를 정리해 주는 글쓰기, 그런 글쓰기를 주제로 이끌어가고 있는 모임,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도 위로를 주는 문장을 몇몇 구석에 써낸 나의 독립출판물, 무심코 들렸던 가사가 내 귓속에 확 감겨버리는 노래 한 곡, 끄적이다가 얻어걸린 느낌 있는 낙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새벽까지 몰입하게 되는 책이나 드라마, 눈길이 머무르는 담백한 문장 한 줄, 월요일 저녁 수업이 끝나고 마시는 맥주 한 캔, 함께 먹는 컵라면이나 삼각김밥 그리고 감자칩, 요가수업이 끝난 뒤 어둠 속의 사바사나 5분, 수업 중 예상치 못하게 회원님들과 웃음이 터지는 순간, 공연 보러 온 친구가 선물해 주는 꽃다발, 그 꽃을 최소 일주일 동안 잘 관리했을 때, 무대가 끝난 뒤 이어지는 커튼콜과 관객과의 대화, 그런 하루의 끝에 내일이 없는 것처럼 마시는 술자리, 연극을 시작하기 전 아이디어를 내뱉는 시간, 유독 연습이 잘 되는 어느 날.
이 모든 걸 나는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