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_ 영국 스위스 독일
사람들은 때때로 나의 장점을 뒷감당은 생각하지 않는 무적의 추진력이라고 말한다. 물론 즉흥적인 결정이 주는 희열을 방패삼아 감당해야할 것을 숨기지만, 저지르고 나면 어떻게든 수습하기 때문에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물아홉이 일주일도 안남은 시점에 덜커덕 유럽여행을 가기로 결심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비행기 티켓 결제 알람이 왔을 땐 살짝 무섭긴 했지만, 어쩌겠어. 잘 가야지.
여행의 큰 목적을 극장 투어로 결정했다. 졸업은 못했지만, 대학원을 수료했고, 이 마무리와 시작의 경계에서 여행을 간다면 양심상 전공의 연결고리는 놓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이 먹는 즐거움이 크지 않은 편이라 대부분의 예산을 티켓비에 쓸 수 있을 거 같았다. 이왕가는 거 극장과 공연을 테마로 삼으면 조금 더 가는 이유가 그럴싸해 보이겠지 싶기도 했다.
수업시간에 다뤘던 극장들에 대한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찾기 위해 졸음의 흔적이 남아있는 수업노트를 뒤적였다. 연구 년을 독일에서 보내신 교수님 말에 의하면 독일의 관객들은 공연이 끝나면 집에 바로 가지 않고 로비에서 열띤 토론을 한다. 그러다 막히면, 분장을 지우고 집에 가는 배우라도 서슴없이 붙잡아 질문을 한다고 했다. 배우와 관객이 한 덩어리가 되면 말소리가 극장을 가득 채우고, 독일의 공공극장은 그들이 집에 갈 때까지 문을 닫지 않는다. 쉽게 말하면 극장의 주인은 시민이다. 시민을 위하여 자유롭게 열려있다는 극장의 모습도 직접 내 눈으로 보고 싶었다.
오랜 기간 체류할 돈은 없었기 때문에, 여행기간은 3주 남짓으로 정했다. 이 정도면 교수님께서 추천해주신 영국과 독일의 극장은 충분히 볼 수 있을 거 같아 깊게 고민하진 않았다. 나는 정보가 많은 SNS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라, 손가락을 조금만 부지런히 움직이면 여행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동생이 나에게 지어준 별명 중 하나는 핑거 프린세스(손가락 공주; 특이사항, 검색을 귀찮아함)다. 그래서 숙박예약과 먹거리는 나보다 먼저 여행을 다녀온 친구들의 추천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마지막으로, 유럽을 다녀온 사람들이 일순위로 추천하는 스위스를 하나 더 끼어 넣고 일정을 정리했다. 스위스는 친구가 추천해준 민박에서 모든 걸 다 알아서 해준다고 했기 때문에, 가이드북은 영국과 독일만 준비했다. 그리고 내가 머무르는 에어버앤비 주인님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보고자, 다이소에서 한국전통문화와 대표적인 먹거리가 담긴 마그네틱을 구매했다.
비록 준비기간이 이주도 안 되는 것 같지만, 나는 유심칩이 있기 때문에 와이파이는 어디서든 터질 것이다. 게다가 혼자인 듯 혼자가 아닌 여행이므로 설마 유럽에서 미아가 되진 않을 거다. 1월 둘째 주 금요일, 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처음 타는 장거리 비행기에서 맥주가 무료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싸. 냉장고에서 막 꺼낸 시원한 목 넘김은 아니지만, 가보지 않은 장소에 대한 낯선 두려움을 달래주기엔 충분한 탄산이었다.
영국, 스위스, 독일
태어나 처음 떠나는 유럽여행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