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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예신 Feb 04. 2020

[기생충]: 상징을 모방하라

우리 사회의 기생충이 살아남는 방법

영화 <기생충>은 기생충의 속성을 하층민과 부유층의 모습 

기생충은 숙주를 빨아먹고 산다. 이 영화의 기생충은 기택 가족이고 숙주는 박 사장네 가족이다. 그


비슷한 처지에 놓인 또다른 기생충 같은 존재들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해묵은 대립구도는 이 영화에서 상상할 수 없다.


빈곤한 기생충 가족에게 자본가는 적이 아니라 닮고 싶은 대상이다. 영화의 상징어인 'pretend'(모방하다, ~인 체하다)는 바로 그런 기생충의 속성을 암시한다. 기생충들은 숙주를 모방하고 빨아먹음으로써 자신의 빈 공간을 채워넣는다. 그러나 모두가 다 숙주의 영양분을 빨아먹을 순 없다. 필연적으로 투쟁이 일어난다. 그런 점에서 기생충들의 모방은 생존과도 연관되는 싸움이다. 삶이 곧 투쟁이 된 이들은 영악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니 자본주의 사회의 가난한 이들이 선하고 순진할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틀렸다. 이들은 배를 채우기 위해 다른 기생충을 밀어내고 숙주를 모방하려는 욕망을 품고 있다.  


그래서 기생충들에게 공생은 사치다. 다른 기생충이 죽어야 자신이 산다. 그래서 그들은 엎치락뒤치락 밀어내기 경쟁을 한다. 불우이웃이 "나는 불우이웃이 아니야"라며 자신과 구별을 짓는다. 박 사장네 집에 들어온 충숙은 자신의 정신까지 안주인을 모방해버린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불우이웃은, 아무도 대놓고 구별의 대상이라고는 말하진 않지만 누구라도 되고 싶어하지 않는 대상이다. 가난조차 가난함을 달가워하진 않는다. 구도자가 아니고서야 누구도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게 자본주의 사회 속 현실적인 을의 얼굴이다. 착하고 어딘가 모자란, 그러나 계급의식으로 어깨동무하는 마르크스적인 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기택 가족의 기생충스러움은 나에게 그렇게 읽혔다.


모방은 기생충만의 특성이 아니다. 숙주도 모방한다. 박 사장네 가족들은 부잣집의 전형적인 상징들을 모방하며 그들의 고장난 모습들을 감춘다. 다혜의 애정결핍증, 다송의 ADHD 증상, 연교의 어딘가 나사 빠진 듯한 모습, 박동익의 상스러운 모습 등은 판타지 드라마 속 단란하고 귀품있고 안정적인 부잣집 가정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들은 성처럼 두껍고 높은 저택, 번쩍이는 세단, 고액과외, 화려한 생일 파티 등 부잣집의 상징들로 그들을 감춘다. 이즈음 pretend의 의미는 사회적으로 확장된다.


'제시카 징글'을 부르는 기정(박소담 분)

상징은 강력한 모방의 수단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상징 자본이 갖는 힘을 알고 있다. 한국 엘리티시즘의 상징 중 하나인 연대 마크, 명문 연구대학 일리노이주립대 등. 자본주의에서 세습 자본주의로 이행 중인 사회, 계층 사다리의 다리가 하나씩 사라지는 사회, 평범한 노동력으론 부를 축적하기 힘든 사회, 그런 사회일수록 상징 자본을 숭배하는 경향이 있다. 상징은 강력한 권력이자 보험이기 때문이다. 부자와 빈자는 자본을 공유할 순 없어도, 상징은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징과 자아를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인 사회에서는 상징이 곧 권력이다. 그런 사회의 포탈과 SNS가 상징의 전시장을 대신하는 양상은 흔한 풍경들이다. 물론 그것은 잘못된 건 아니다.


어쨌든 상징은 많은 것을 가능케 하고, 사람들은 이를 잘 알고 있다. 상징을 통해 주인집을 차지한 기택 가족은 주인의 상상적 삶을 모방해본다. 테이블에 와인을 늘어놓고 바깥 창을 보며 게으르게 술을 마신다. 욕망 주체는 욕망의 매개자를 모방함으로써 욕망을 성취한다던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이 기택 가족에게도 고스란히 그려지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숙주에 기생하려는 기생충의 모습들. 박사장 가족을 욕망할 대상으로서만 보면서 전개되는 추한 모습들.


그러나 그들의 모방은 결국 실패한다. 그들에게 찌들어있는 어둡고 축축한 가난의 냄새가 마치 몸에 깊이 각인된 주홍글씨처럼 그들의 정체를 폭로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난의 냄새에 코를 틀어쥔 부자의 모습에 심기가 뒤틀린 기생충이 발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결국 이 영화에서 pretend하지 않는 것은, 사회의 불편한 단면을 그대로 노출시켜버리는 영화 그 자체밖에 없다. 영화의 원제가 데칼코마니라고 했던가. 다른 듯 같은 기생충 가족과 부잣집 가족의 삶을 통해 영화는 의외로 단순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사회는 거대한 모방의 무도회장이다. 모두가 상징을 덧쓰고 화려한 욕망의 군무를 추지만 파티는 언젠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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