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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예신 Feb 04. 2020

[토르 라그나로크]: 히어로물 그 뻔함에 대하여

할리우드 히어로 영화에 대한 단상


‘할리우드 히어로 영화’ 하면 떠오르는 공식들이 몇 가지 있다. 초인적 능력을 지닌 영웅들, 권선징악 구조, 겉잡을 수 없이 거대한 세계관 등. 여태 수많은 히어로들이 그런 공식을 안고 한국에 상륙했다. 어떤 히어로는 흥행 참패를 거두기도, 어떤 히어로는 두둑한 달러와 팬심을 챙겨 떠나기도 했다. 


마블 코믹스의 히어로 시리즈는 상업적으로 꽤 성공한 작품 중 하나이고, 어제 본 <토르:라그나로크>도 마블 시리즈에 속한다. 난 개인적으로 할리우드 히어로 영화를 챙겨보지는 않지만 요 몇 년새 마블 혹은 DC 코믹스의 수많은 히어로들이 우후죽순으로 영화화되고 있다는 점 정도는 잘 알고 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토르:라그나로크> 티켓을 끊으면서, 문득 마블 시리즈가 왜 그렇게 한국에서 유난한 인기몰이를 하는지 궁금해졌다. 차별화된 스토리 없이 뻔한 권선징악 구조에 캐릭터만 바꿔 개봉하면 흥행 참패는 불 보듯 뻔할 테니,적어도 그런 클리셰를 벗어난 무언가가 마블 시리즈에 갖춰져 있어야만 이러한 한국적 흥행열이 설명이 될 거 같았다.


대개의 미국 히어로물은 단순한 권선징악의 구조를 채택한다. 불의의 사고로든, 타고난 것이든 영웅은 초인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고, 악당과 치열한 결투를 벌인다. 악당은 막대한 힘이 있지만 보통 어이없는 실수나 계기로 몰락한다(이때 악은 완전히 궤멸하든지, 아니면 후속편에서 부활하리라는 암시를 주며 잠정적으로 소멸되든지 둘 중 하나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승리한 영웅은 왕국을 재건한다.



이런 권선징악 구조는 대체로 한계점도 뚜렷하다. 선과 악을 거시적으로만 다루다보니 세밀한 이야기가 실종되어버린다는 점이다. 가령, <토르:라그나로크>에서 헬라가 악의 화신이 된 이유는, 그녀의 야욕의 크기가 부왕인 오딘의 야욕보다 컸기 때문이라는 단 한 줄의 설명으로만 제시된다. 헬라, 토르, 로키 모두 같은 오딘의 핏줄인데 헬라는 왜 뜬금없이 그런 욕망을 갖게 된 건지, 그 욕망의 크기가 부왕과 도대체 왜 상치되는 것인지, 그것이 왕국에 어떤 위해가 되는 건지, 꼭 자기 핏줄을 내치고 봉인해야만 했는지 등에 대한 세밀한 이야기는 통째로 스킵된다.


뻔한 구조가 갖는 이런 한계점을 관객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할리우드 히어로물은 점점 더 세고 영리한 악당 캐릭터를 고안해낸 뒤, 영화 배경을 지구가 아니라 은하계로 확장시켜 관객의 집중을 분산시킨다. 제작자들은 이 지점에 자본력과 CG 기술을 총동원해 기상천외한 판타지적 이미지를 창출해냄으로써, 초인간적인 힘들의 향연을 극대화한다. 


휘황찬란한 영상에 의해 집단적으로 영상 최면에 걸린 관객들은 영웅이 총, 칼, 폭탄을 모두 맞고 살아남아도, <토르:라그나로크>처럼 캐릭터가 분신술, 축지법, 공중부양술을 모두 겸해도, 머리털을 잘린 토르는 왜 성경 속 삼손과 달리 여전히 힘이 센지 설명해주지 않아도 문제 삼지 않는다. 히어로가 멋진 볼거리만 제공해주면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를 용서할 거라는 걸 알기에 노련한 할리우드 제작자들은 영웅 실험을 감행한다.




물론 모든 히어로 영화가 볼거리에만 치중하는 건 아니다. <나니아 연대기>처럼 신성-몰락-부활-승리 같은 성경적 서사를 영화에 삽입해 ‘영웅 예수’를 부각시키거나 아니면 <캡틴 아메리카>처럼 미국 특유의 영웅 심리와 포부를 대중의 집단기억 속에 되새겨 팍스 아메리카나를 선전하는 경우도 있다. 볼거리도 볼거리지만 그런 영웅 영화가 주는 ‘영웅 뽕’에 취하고 싶은 소비자들도 관객의 다수를 차지하니까. 


혹 할리우드 히어로물은 영웅이 활약하는 배경이나 악당이 목표하는 노획물을 통해, 수호해야 할 미국적 가치나 주목해야 할 사회적 화두를 제시하기도 한다. 할리우드가 생산한 영웅들을 시계열로 늘어놓으면 당대 미국인들이 마주하고 있는 사회는 어떠한지, 그들의 상상력의 현주소가 어디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토르:라그나로크>는 어떤 점에서 특별한가? 영화를 다 본 후 내가 내린 답은 ‘모르겠다’이다. 예상한 대로 볼거리는 참 풍성했지만, 권선징악 구조의 한계를 충분히 극복하지 못했다. 성경적 서사가 조잡하게 드러나며, 이념 주입도 딱히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데 9점에 달하는 관람객 평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마블 브랜드에 대한 한국인의 맹목적 추종? 자취를 감춘 한국적 영웅에 대한 대리 충족?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 부려봤던 영웅 심리 추억하기? 나로서는 답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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