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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색

탑골공원에 내던져진 사람들

by Parkers

살면서 탑골공원 인근을 지나갈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볼거리나 맛집이 있는 곳도 아니기 때문이다. 주름진 행상꾼들이 그 일대를 점령하고 앉아 잡다한 구제 물품을 진열해놓고 있는 살풍경을 보러 갈일이 내게 딱히 있지도 않았다. 오래전 호기심에 구제 의류를 구경하러 갔다가 실망만 잔뜩 하고 돌아온 게 전부다.


그러다 어제 종각역 근처에서 친구와 저녁 약속이 있어 탑골공원 근처를 지나게 됐다. 종로 3가역에 내려 행선지를 향해 더듬거리며 걸었다. 그 근방에 온 건 실로 오랜만이라 지리가 가물가물했다. 눈이 닿는 대로 걷다보니 어쩌다 발걸음이 탑골공원 쪽 골목길을 향하게 됐다. 시간은 오후 6시 30분. 초여름이다보니 날은 대낮처럼 밝았지만, 골목길에 들어서자 빛이 차단되면서 주위가 어두워졌다. 그리고 이내 생경한 풍경이 내 눈에 들어왔다.


노인들이었다. 정확히는 술 취한 채로 길가에 엎어져 있거나 드러누워 있는 노인들이었다. 성별의 구분도 없이 대여섯 명이 한데 엉켜 있었다. 죽은 것 같기도 하고 기절한 거 같기도 한데 자세히 보니 배가 들썩들썩거리고 있었다. 주위엔 막걸리병이며 소줏병이며 담뱃갑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내기 바둑을 둔 흔적 또한 보였다. 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노인들이 잡다한 더미 속에서 마치 버려진 사물처럼 뒤엉켜 잠들어 있는 모습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어제 걸었던 그 골목의 모습. 사진보다 더 어지러웠다(사진 출처=헤럴드경제)


골목길의 다른 편에는 간이 테이블이 서너개 놓여 있었다. 누추한 차림새의 노인들 열댓명이 테이블마다 자리하고서 장기를 두고 있었다. 뭔가를 걸고서 두는 것으로 보이는 그 장기를 관전하는 노인들은 옆에서 욕지거리를 내뱉기도 하고 성이 난듯 의자를 가볍게 걷어차기도 했다. 나는 일부러 그 골목길을 속도를 낮춰 걸으며 눈에 보이는 장면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골목길이 끝나고 도보로 이어지는 어귀에도 노인 한두 명이 술 취한 채 코를 골고 있었다.


TV 다큐멘터리나 만화 <식객>에서 묘사되곤 하던 탑골공원의 모습은 내 눈에 그렇게 비쳤다. 오갈 데 없는 노인들이 종교단체의 배식을 받기 위해 근방에 줄을 선다는 건 들어서 대강이나마 알고는 있었다. 여러 매체 속에서 묘사된 노인들은 적어도 식욕을 충족함으로써 누추한 삶이나마 이어나가겠다는 생의 의지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그날 내 눈에 들어온 이들만큼은 삶에 대한 의지도, 소망도 없는 모습이었다.


약속 장소를 향해 걸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교차했다. 그들의 사연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들이 그런 누추한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거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감당하지 못할 어떤 삶의 무게에 짓눌리고 풍파에 휩쓸려 결국 그곳에 내던져진 것처럼 보였다. 저들도 지금의 나처럼 크고 작은 꿈과 목표로 빛나던 젊은 시절이 있었을 것이고, 그때는 한두 번의 실패만으로 주저앉을 만큼 체력과 정신력이 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상반기 취업이 잘 안풀렸다고 해서 단번에 생의 의지가 꺾이지 않듯, 그들의 삶에도 한때는 회복탄력성이 충만한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노인들의 모습에서는 커다란 고통이 읽히는 듯 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고통스러워서 몸부림치는 게 아니라, 극심한 고통 때문에 오히려 통각을 상실해버린 듯한 모습이랄까. 그들이 왜 하필이면 3.1운동의 발상지인 탑골공원에 모여들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 노인들은 저마다의 사연이 있겠지만, 그곳에 모여든 같은 처지의 노인이 아니고서는 최소한 그 사연을 듣거나 이해해줄 만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을 우연히 지나치는 사람들이라면 탑골공원의 노인 무리를 보며 혀를 쯧쯧 차는 데 그칠 테지.


역설적이게도 그들을 보면서 나는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지 묻게 된다. 앞서 말했듯 노인들이 그런 삶을 스스로 선택했을 리는 없다. 다만 운명이라 불리는 이미 그려져 있는 삶의 궤적이 그들을 탑골공원으로 모여들도록 등 떠민 게 아닐까 싶다. 나에게는 과연 정해진 운명의 행로가 있을까. 만약 그 운명이 개인의 의지를 뛰어넘어 존재하는 것이라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사람들은 보통 이를 운명론적인 태도라고 부르기도 하던데 나는 그런 운명에 순응하며 사는 게 맞는 걸까. 만약 내 운명의 종착역이 탑골공원이라면, 혹은 그렇게 될 거라는 점을 미리 전해듣게 된다면, 나는 과연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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