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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예신 Jun 14. 2020

어느 실패한 엘리트 백수 의대생의 초연함

오래 알고 지낸 의대 출신 엘리트 백수가 있다. 의대를 나왔는데 의사는 아니다. 변변한 직업도 없다. 나이는 마흔 다섯. 통 잔고는 40만 원. 이럴 수가 있나 싶다. 소설 같지만 나의 친한 지인 이야기다. 4년 전쯤인가 학교서 수업 하나를 같이 듣다가 처음 알게 됐다. 그가 먼저 연락을 해왔다. 친해진 계기를 굳이 꼽자면 비슷한 음악적 취향이나 성향 정도를 들 수 있겠다. 지금은 서로의 가족사를 알 정도로 가까 사이가 됐는데 여전히 서로에게 '~씨' 존칭을 쓴다. 형이라 부르기엔 나이차가 있고, 선생님이라는 표현은 그가 싫어하는 탓이다.


그는 의대서 실패한 케이스다. 스스로 그렇게 말했다. 보기 드문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의대를 갔으면 의사 면허를 취득하고 페이닥터 혹은 개원의가 되는 게 일반적이니까. 내가 아는 의대 출신 지인 중에 백수로 사는 사람은 그밖에 없다. 돈을 아예 안 버는 건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 비정규직으로 대학병원에서 일을 한다. 하지만 고정급이 아닌데다 간헐적 일자리라서 사실상 백수다. 아픈 사연이 있을 테지만 구체적으로 물어본 적은 없다. 굳이 그 사연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 또한 실패의 내막에 대해서 자세히 말한 적이 없다.

 

집안 내력을 들어보면 그의 실패는 더욱 두드러진다.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는 모두 서울대 출신 의사다. 할아버지는 소아과 개원의였고, 아버지는 박사 학위를 받고 40년간 서울 모 대학 의대 교수로 일했다. 어머니는 이대 출신 미술가에 여동생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 부장이다. 집은 강남 한복판에 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한국의 전형적인 초엘리트 집안이라는 말이다. 그런 집안에서 40대 중반의 미혼 백수 남성이라니. 어딘가 이질적인 느낌이다. 실제로 가족 관계그리 각별하지 않다. 그는 어머니를 빼곤 가족과 친하지 않다고 나에게 종종 말했다.



지난해 그의 초청을 받아 예술의 전당 앞 이탈리안 레스토랑 '모차르트 502'에서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다. 이런 저런 대화가 오고 갔다. 아버님의 음악적, 의학적 지식과 어머님의 예술적인 격조로 가득한 대화였다. 게다가 나를 대하는 매너부터 음식을 덜어주는 친절함까지, 적어도 내 눈엔 무엇 하나 빠지지 않았다.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이렇게 안정적인 환경에서 그는 왜 실패했을까.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이내 단념했다. 그의 과거를 섣불리 추론하는 건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그가 현재 삶을 살아내는 관점을 배우는 게 훨씬 가치가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배울 게 많은 사람이기도 했고. 그는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는지 아는 것도 많고 똑똑하다. 게다가 겸손하고 배려심도 많다. 그건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자연스레 생기는 성품은 분명 아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스트레스 환경에서 초연하다. 원래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31살까지만 해도 비관적이고 냉소적이었다고 나에게 말했다. 아마 집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탓일 거다. 그런데 심리학을 깊게 공부하고, 많은 사람과 대화를 하고, 식견을 넓히면서 점차 성격이 변했다고 했다. 특히 남에게 무언가를 챙겨줄 때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자신의 말로는 그것 또한 이기적 만족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볼 땐 상대방의 감사 표현에 민망해서 그렇게 둘러대는 것 같았다. 얼마 전에는 굳이 서초에서 목동까지 와 나에게 코로나 예방용 마스크를 한 무더기 전해주고 간 적도 있다.


그래서 나에겐 특별해 보였다. 실패를 다루는 법을 득한 사람 같다랄까. 실패로부터 초연하는 법을 배웠으니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실패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객관화할 줄 아는 것도 분명한 능력이니까. 물론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는 걸 수도 있다.  그의 깊은 속까지 내가 다 알지는 못하니까. 그러나 겉으로라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다. 인생 공부와 정신적인 훈련이 웬만큼 동반되지 않고선 말이다. 예전에 불교를 깊게 공부했다던데 그것이 일정 부분 영향을 준 건가 싶기도 하다. 그런 내공이 있는 사람이 나의 오랜 지인이라는 사실이 새삼 신기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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