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퇴근해 집에 들어가니 아내가 "오늘 하루 종일 너무 힘들었다. 저녁 못 차리겠다. 나가 사 먹을 힘도 없으니 배달시켜 먹자"라고 한다. 38년 결혼생활 동안 배달음식 시켜먹자고 한 적은 손꼽을 정도로 매식을 좋아하지 않는 아내이기에 얼른 그렇게 했다. 하기야 코로나로 인해 1년 반 동안 아침저녁으로 내 식사 차리려니 얼마나 힘들었겠나. 과거에 비해 요즘 들어 배달도, 매식도 많이 늘긴 했지만 이번처럼 힘들어는 건 처음 봐서 여간 안타깝지 않았다.
다음 날 혼자 자취하는 딸내미가 집에 온다고 하길래 (딸애는 지난주에도 다녀갔다.) 저녁에 퇴근해서 아내에게 "여보, 딸내미 집에 오지 못하게 해. 당신 안 그래도 힘든데 걔가 또 오면 당신이 이것저것 챙겨줘야 하잖아"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대뜸 아내가 화를 버럭 낸다. "아니, 아비가 돼 가지고 어떻게 딸내미가 온다는데 못 오게 하냐? 당신 아버지 맞아?" 이런다. 순간 멍해졌다. 내 딴에는 자기 생각해서 그런 건데 나를 혼내다니,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처음에 손자가 태어나기 전에 아내가 갱년기를 겪으며 너무 힘들어하길래 맞벌이하는 아들 내외에게 "네 엄마가 너무 힘드니 니들이 애 낳아도 우리가 못 돌봐준다"라고 했다가 아내한테 박살 나게 깨졌다. 조상이 돼가지고 어떻게 그러냔다. 내가 일을 해야 하니 돌보는 건 한계가 있고 어차피 할머니가 주도적으로 돌봐야 하니 자기 생각해서 그런 건데 오히려 나를 혼냈다. 결국은 며늘 아이 육아휴직 끝나고 복직하자 9개월 동안 우리 집에서 손자 돌보면서 아내가 손목 통증, 허리 통증은 물론 대상포진까지 겪었다. "거 봐, 내가 미리 예견했잖아, 내 말 안 듣더니 꼴좋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차마 입 밖으로는 못 꺼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아내는 아이들한테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나한테 퍼붓는다. "당신이 안 도와줘서 내가 이렇게 힘들다"라고 말한다. 자기 몸이 망가지든 말든 아이들 일이라면 어떤 부탁도 거절 못 하고, 아니 애들이 도와 달라지도 않는데 자기가 먼저 나서서 애들 챙기느라 그렇게 된 건데 왜 내 탓을 해? 내가 노는 사람도 아닌데... 참 나, 내가 그렇게 만만해?
며칠 지나 내가 아내한테 "여보, 나한테는 애들보다 당신이 우선이고 최고야. 애들이야 이제 자들 앞가림하고 살아야지. 자기들도 이제 성인인데 언제까지 그렇게 끼고 돌 거야? 내가 애들을 사랑 안 하는 게 아니고 내가 당신 안 돌봐주면 누가 돌봐줘? 걔들이 돌봐줘? 내가 당신 사랑해서 그런 거야."라고 말했지만 아내는 귀담아듣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부모가 돼가지고 애들한테 그러면 안 된다며 오히려 내게 훈수를 둔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들다가도 '그래, 나 아니면 누구한테 그러겠어.'라는 생각이 든다. 원래 성정이 온순한 사람인지라 다른 사람에게는 "싫다~ "소리 못하는 사람이다. 나한테도 못하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얼마든지 나한테 화풀이 해. 나는 그래도 당신 사랑할 거야. 나는 팔불출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