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논비건 가족 사이에서 비건 하기

설날에 생긴 일

by 여유

명절, 아니 그냥 집 가는 거 자체가 싫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 큰 이유 하나는 채식하기 어려워서이다. 채식 한다고 말하기도 껄끄럽고, 고기가 들어간 국은 결국에 고기를 먹게 되는데 그런 내 모습이 싫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족과 부대껴야 내가 뭘 먹는지 말할 수 있다는 걸 이번 설날에 집에 갔다오고 느꼈다.


명절 중에 같이 밥 먹는 순간은 있을 수밖에 없고 한번씩 이 질문을 받는다. "그런데 너는 왜 채식을 시작했어?" 길게 나의 비건의 이유에 대해 설명할 수는 없어 짧게 대답하곤 했는데, '아 이게 이렇게 건조한 한 마디로 이해시킬 수 있는 게 아닌데...'라며 아쉬운 순간들이 있었다.


그래도 명절 중에 어느 하루는 오빠랑 새벽까지 이아기하다가, 동생이랑은 차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비건에 대해 길게 말할 기회가 있었다. 무조건 안듣고 매도하는 게 아니라 조금 열린 마음으로 질문을 해주고 들어줘서 내가 고기가 왜 안 건강한지, 공장식 축산이 얼마나 끔찍한지 설명할 수 있었다.


13살 나의 귀여운 동생은 다 듣고는 "이제 고기를 안 먹어야겠어"라고 말했다. 이렇게 바로? 놀라기도 하면서 동시에 어린 아이가 당장 학교 급식부터 고기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인데 너무 어렵고 맘고생할 게 훤히 보여서 이렇게 덧붙이기도 했다. "그런데 한국사회가 너무 고기 중심의 사회라서 완벽하게 하기는 어려울거야. 그래도 조금 더 줄이자는 거지. 치킨 한 달에 두번 먹을 거 한번 먹고, 그렇게 좀씩 줄여나가는거야." 사실 어차피 나는 동생이 저렇게 말해도 행동 변화가 크게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또 들은 거 다 까먹고 치킨 시켜먹자 하겠지. 그래도 내게 설명할 기회가 있고 그들이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에 나는 희망을 느꼈다.


엄마도 내가 동생이랑 차에서 이야기할때 운전하면서 좀 들은 것 같았다. 어제 저녁 엄마는 내가 나물 좋아한다고 이렇게 밥상 차려주셨다. 나물 만들기 귀찮을텐데 나를 위해 해주는게 고마웠다. 그리고 아빠의 치킨 권유에 "어차피 예송이는 안 먹어"라고 대신 말해줘서 편했다. 비건 커밍아웃, 비밍아웃은 하면 거슬릴까봐 자꾸 논비건인 척 먹고 그랬는데 또 밝히니까 편하긴 했다.


가서 솔직히 매일매일 과식하고 논비건인 척 고기도 많이 먹었고 논비건 가족을 위해 동물 요리를 대신 주문해야하는 상황이 참 곤란했지만 그래도 끝날 때쯤 이러한 변화만으로도 공존의 가능성을 조금 봤다. 가족과의 접촉을 불편하다고 멀리 할 것만은 아니구나. 차근히 그들에게 이해시킬수있게 통화도 자주 해야겠다. 순수하게 받아들여준 동생을 보니 더 잘 설명해야겠다는 생각, 그러려면 공부도 더 꼼꼼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명절날 음식 문화가 바뀌려면 내가 요리를 배워서 상차림을 주도, 채식이면서도 명절 느낌이 나고 더 맛있고 속 편한 요리로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근데 우리집 명절 문화가 아예 바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또 마음에 안 드는 것들 - 누워서 침뱉는 것 같아 열거하지 않겠다 - 도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것 같단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빼고 명절날 가족들이 모일 수 있는 것 자체는 좋은 것 같다. 각자 일상을 살다가 모여서 오랜만에 유대감을 느끼는 건 좋은 일이다. 그래서 소망이 생겼다. 정말 좋은 사람, 비건 지향 사람 만나서 처음부터 우리의 문화를 만들어가기. 내가 편히 있을 수 있는 가족을 내가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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