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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슬 Dec 02. 2023

머리맡 책과 책갈피

나는 내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2)




나의 눈빛이 반짝한 순간. 거울을 보고 있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지난여름, 바닥에 붙어 며칠을 지내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친한 언니를 만나러 잠실에 갔다. 망원에서 잠실새내까지 1시간 이상이 걸리는 지하철 여행. 그 날밤에 우리는 같이 별을 접었다. 언니의 별 접기 기준은 상당히 까다로웠다. 나름 별 접기에는 자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언니는 내가 접은 별을몇 번 더 다듬은 뒤 ‘완벽한 별’이 들어가는 곳으로 넣어줬다. 그곳엔 모양이 일정하고 각이 살아 있는 완벽한 별들이 모여있었다. 그럼, 언니의 다듬기에도 완벽해지지 못한 별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나같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내가 별 접기 흥미가 떨어질 때쯤 언니가 책을 건넸다. 하나는 여러 작가들이 같은 주제로 쓴 소설이 실린 책. 하나는 그들 중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장편소설이었다. 항상 책을 추천할 때 취향에 맞지 않을까 봐 조심스러웠다. 책은 줄거리뿐만 아니라 전개 속도, 문체나 소재 같은 걸로도 취향을 타니까. 언니가 추천해 준 두 권의 책이 내 취향에 딱 맞기도 바랐지만, 그냥 책을 건네받았던 그 순간, 나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거울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작년에 비해 책을 덜 읽게 됐으나 재밌게 읽은 하나의 책을 오래 기억할 수 있어서 좋았다. 빠르고 치열하게 읽어내렸던 기억도 재밌었으나, 아무래도 오래 기억하고 여운을 느끼기엔 너무 급한 속도였다.


여름이 시작될 때쯤 읽게 된 ‘1차원이 되고 싶어’는 도서관에서 찾던 책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빌려온 책이었다. 책의 존재도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왜인지 ‘읽어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드는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첫 페이지를 읽어 넘긴 순간, 시도 때도 없이 책 생각만 했다. 약속을 나갈 때는 읽지도 않을 책을 가지고 나갔고, 소장본으로 사서 새벽마다 읽은 부분을 또 읽었다. 책은 나에게 가장 필요할 때 다가온다. 나에게 지금, 이 이야기가 필요해서 다가온 것이다.


친구와 투다리 빨간 테이블 앞에 앉아 ‘소중함’에 대해 얘기했다. 물건을 하나 사면, 그것을 오래 쓰는 사람을 항상 동경해 왔다. 가방이든, 신발이든, 식기나 인테리어 용품일 수도 있고, 작은 잡동사니 하나라도.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애정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오랜 시간의 흔적을 증명하는 사람들이 좋았다. 그런 사람들은 물건뿐만 아니라 삶의 전반적인 태도도 그러했다. 천천히 음미하고 느끼고 현재와 주위를 둘러볼 줄 안다. 길을 걸을 때도, 걸음이 느린 앞사람을 앞지르며 미간을 찌푸리는 게 아니라 앞사람의 보폭에 맞춰보며 조금 천천히 가도 된다고. 그러다 보면 내가 무심코 지나치던 길에 무엇이 있는지 다시 보인다고. 일을 시작할 때도, 당장 안된다고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받아들이고 충분히 생각한 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짜증은 어차피 나에게로 오니까. 남에게로 가는 것 같아도 나에게 더욱 진하게 남으니까.


책도 그렇게 읽어보도록 한다. 너무 재밌다고 후루룩 읽어내리지 말고, 마음에 안 든다고 홱 덮어버리지 말고.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고, 책갈피를 넣어 잠시 쉬어본다. 사실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진짜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겠고, 약간 재미도 없는데, 그래도 선물 받은 책갈피를 폭 끼워 넣고 머리맡에 놓았다. 늦게라도, 다시 읽어보려고. 언제가 됐든, 계속해서 읽어보려고. 책갈피에는 아직 장식되지 않은 크리스마스트리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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