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의 자산이 아닌, 오롯이 내 이름으로 남는 기록들

5년의 호치민을 한 권의 전자책으로 압축하는 고통과 가치

by Korea Tiger

유튜브라는 가벼운 스낵 콘텐츠로 '실행의 근육'을 막 예열했을 무렵,

나는 더 무거운 숙제 하나를 꺼내 들었다.


내가 가진 가장 날카로운 무기, 즉 5년의 호치민 경험을 시장에 내놓을 차례였다.

베트남 법인장으로 보낸 1,800일. 그건 내 커리어의 정점이자, 가장 치열했던 야전의 기록이었다.

그런데 그 방대한 노하우는 퇴사와 동시에 조용히 회사 서버 속에 박제되어 버렸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공유 폴더 어딘가에, 내 이름 석 자도 없이 말이다.

'조직의 자산'이 아닌 '개인의 이름으로 된 지식'을 세상에 남겨야 한다는 절박함.

그게 나를 다시 책상 앞으로 불러냈다.




1. 지식의 구조화와 실전적 가치 사이의 간극


집필은 예상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처음엔 쉽게 생각했다. 5년이나 살았는데 쓸 거리가 없겠나 싶었다.

머릿속엔 이미 콘텐츠가 넘쳤다.


현지 파트너와의 기 싸움, 조직 세팅 과정의 시행착오, 호치민 뒷골목에서 체득한 비즈니스 감각들.

그냥 쏟아내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하자 벽이 나타났다.

경험을 '나열'하는 것과 그것을 유료 지식 상품으로 '구조화'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내가 몸으로 체득한 감각을 어떻게 글로 옮기느냐를 넘어,

이걸 읽는 사람이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돈 내고 살 만한 정보'로 만드는 게 진짜 숙제였다.


AI 도구로 초안의 논리를 다듬어보려는 시도도 해봤다.

구조 잡는 데는 나름 도움이 됐다. 하지만 현장의 디테일은 결국 내 손끝에서만 나왔다.

고층 빌딩 회의실에서 오갔던 미묘한 눈치 싸움, 계약서 한 줄 뒤에 숨어있던 현지 파트너의 속내, 말로는 설명하기 애매한 베트남 비즈니스의 불문율들.

이건 경험자만이 복원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AI가 아무리 그럴듯한 문장을 만들어줘도 그 맥락까지 채워주진 못했다.


결국 밤잠을 줄여가며 5년의 세월을 수십 페이지의 PDF 안에 밀어 넣었다.

탈고하던 날, 솔직히 말하면 홀가분하기보다 허탈했다.

'이게 맞나? 이걸로 충분한가?' 하는 의문이 마지막까지 떠나질 않았다.




2. 니치 마켓의 냉혹함과 지식 상품의 본질


우여곡절 끝에 원고를 마치고 크몽(kmong)에 등록했다.

승인이 떴고,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알림을 기다렸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구매 알림은 울리지 않았다.


'베트남 비즈니스 전략'이라는 주제는 시장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좁은 카테고리였다.

재테크도, 자기계발도, 다이어트도 아닌 영역.

회사 생활을 하며, 숫자로 성과를 증명해 온 나에게 이 정적은 꽤 서늘한 피드백이었다.

마치 내가 쏟아낸 5년의 가치를 시장이 조용히 무시하는 것 같았다.


"이 정보가 과연 유료 결제의 가치가 있는가?"


스스로를 의심하는 시간이 길게 이어졌다. 잠 못 자며 썼던 원고를 다시 펼쳐보기도 했다.

경력자 눈에 상식적인 내용이 처음 베트남에 가는 사람에게 얼마나 낯선지를 자꾸 잊고 있었다.


그러다 생각을 뒤집었다.

타겟이 좁다는 건 그만큼 그 소수에겐 대체 불가능한 정보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베트남 진출을 앞두고 밤새 검색하다 내 책을 발견한 누군가에게 이 한 권이 수천만 원의 리스크를 줄여줄 수도 있다. 베스트셀러가 아니어도 좋다.

딱 한 사람에게 진짜로 필요한 책이면 충분하다는 확신만은 놓지 않기로 했다.


image.png 당연하지만 내 서비스는 내가 구매할 수 없다..




3. 얻은 것과 잃은 것: 커리어의 마침표이자 새로운 시작점


결과적으로 이 책은 경제적 성공을 안겨주지 못했다.

통장 잔고에 변화는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집필 과정은 내게 전혀 다른 종류의 수확을 안겨주었다.


원고를 쓰면서 나는 지난 5년을 처음으로 '냉정하게' 복기했다.

회의실에서 파트너와 협상을 이끌어냈던 순간, 채용을 잘못해 조직이 흔들리던 밤, 홀로 호치민 골목을 걸으며 자문했던 시간들. 법인장이라는 직함 뒤에 가려져 있던 성취와 상처를 글로 꺼내 놓자 비로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회사가 깔아준 판 위에서 움직이던 장기말이었다는 것을.

무대가 없어지자 내가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그 굴레를 조금씩 걷어낼 수 있었다.

'호치민 법인장'이라는 과거의 타이틀이 아니라, 그 경험에서 추출한 '나만의 지식'이 진짜 자산이라는 걸 확인한 것이다. 내용이 부족할까 떨었던 불안은 결국 더 좋은 콘텐츠를 향한 욕심이었고, 시장 반응에 속 쓰렸던 건 타인의 평가에 너무 매달려 있었다는 증거였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한 단계를 넘어선 기분이었다.




4. 과거의 정리를 넘어 미래의 시스템으로

베트남 전자책은 내 커리어의 마침표인 동시에 디딤돌이 됐다.

그 과정에서 얻은 건 인세 수익이 아니라 '메타인지'였다.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며, 어떤 경험이 실제로 쓸모 있는지를 직접 해체하고 재조립해 본 감각.

그게 이제 새로운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다.


지금의 나는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는 전직 주재원이 아니다.

내가 가진 지식을 어떻게 기술과 결합해 시스템화할지 고민하는 독립 기획자다.

비록 아직은 조용하고 느리며 통장 잔고도 고요하지만, 내 이름으로 된 첫 번째 지식 자산을 세상에 내놓았다는 사실 하나가 다음 기어를 넣을 수 있는 확실한 동력이 되어주고 있다.


멈춰있던 엔진이 다시 돌아가고 있다. 이번엔 회사 연료가 아닌, 내 연료로.




다음 10화 › 아직 대단한 성과는 없지만, 나는 매일 설렌다

— 1인 기업가로서 마주한 현실, 그리고 멈추지 않는 확장

이전 09화9살 아들을 우리 회사 상전으로 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