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부끄러움이 많았다.
한두 명 앞에서 말하는 건 편하고 시선 처리도 자연스러운 데 이게 사람이 많아지면 저절로 속이 갑갑해졌다. 모두가 나를 보는 건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무리 주문을 외워봐도 소용이 없었다. 머릿속에 들이찬 수십 개의 눈동자는 언제나 부담스러웠다.
학교 다닐 때도 앞에서 무작위로 선생님이 발표를 시킬 때 내 이름을 부를까봐 얼마나 속을 졸였는지 모른다.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하다 보면 어느샌가 나는 불타는 고구마가 되어 있었다. 앞에 서 있는 선생님도 머쓱한 얼굴로 그런 나를 쳐다보았다.
대학을 가서도, 졸업을 하고 사회인이 되고 나서도 남들 앞에서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은 종종 생겼다. 그럴 때마다 뜨거워지는 얼굴과 부자연스러운 목소리가 너무 싫었다. 부러웠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도 부담 없이 대화를 나누고 유머를 날리며 제 색깔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그러나 사람은 다 각자의 방식으로 업데이트를 한다.
나는 청산유수처럼 언변을 늘리진 못했지만, 대신 들어주는 역할을 택했다. 차례가 돌아오는 커피 타임에는 간단히 내 의견을 말하거나 대부분은 웃었다. 거의 표정과 몸짓 언어로 대화에 참여했다. 발표를 해야 할 때는 통째로 외워 놓아야 마음이 놓였다. 말하다가 스텝이 꼬이더라도 원래대로 돌아오는 데 그리 애먹진 않아도, 얼굴이 붉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건 그러려니 내려놓아야 할 부분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그런가 싶었다. 나도 다른 사람의 발표를 그다지 주의 깊게 듣지 않는 것처럼 남 또한 그렇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머리로 백번을 이해해도 막상 그 상황이 되면 나의 반응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떨리고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었다.
남들 앞에 서야 하는 직업이고, 회사 안에서 매일 사람들과 부딪히고 웃어야 한다. 소소하게 안부를 묻고 편하게 대해야 하는 상황들도 언제나 맞닥뜨린다. 나에게 호감을 표하는 사람 앞에서는 나도 호감을 표해야 했고, 적대감을 드러내는 사람 앞에선 그에 상응하는 대처가 필요했다. 그때그때 달라지는 변수는 언제나 시한폭탄 같았다. 매번 강화 훈련을 자의 반 타의 반 하고 있는데도 실력 향상은 크지 않았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러다 내 마음속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맨발의 아이를 만난다. 아이의 이름은 바로 ‘수치심’이다. 특별히 잘못한 게 없는데도 수치심은 언제나 내게 자기반성과 뒤늦은 후회를 계속 안겨 준다. 지나간 일은 산뜻하게 안녕, 해야 하는 담백함도 필요한데 언제나 뒤돌아보고 왜 그랬나, 그러지 말 걸 쓸데없는 길을 만들어낸다.
떼 내려고 해봐도, 못 본 척 무시를 해봐도 결과는 다시 원점이었다. 맨발의 아이는 저 구석에서 언제나 축축한 눈으로 나를 힐긋거렸다.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은 있는 그대로 안아야 한다.
나를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
정답은 언제나 간단하다. 중요한 말은 길지 않다. 나의 명제는 수치심을 두고 내 인생을 업데이트해야 한다는 점이다. 혹이 아니라 무기로 만들어야 했다. 본능적으로 주인공을 거부하는 나의 본능은 자연스럽게 타인을 관찰하게 만들었다. 말로, 행동으로 드러내지 않는 숨은 이면을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내 나름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뒤를 이어본다. 혼자서 꿍얼거리는 시간은 편하고 글을 만들어내는 시간은 쏜살같이 빨리 지나간다.
고로, 수치심은 나의 자양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