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세드나의 전설

스물번째 이야기

by 오 광년


그림은 높이와 면적이 1미터는 충분히 넘을 정도의 크기였다. 간결하게 그림을 둘러싸고 있는 포장지를 뜯는 재수의 손이 조금씩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 아-하”하고 감탄사를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색감이 너무나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배경으로 그려진 바다는 인간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정도의 깊이 같았다. 그 한가운데에 긴 머리를 풀어 해 친 여자가 발가벗은 채 상반신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그 대담한 여자의 부풀어진 가슴골 주변으로 새끼 고래가 지나다녔고, 여자의 머리 뒤론 귀신고래의 옆모습이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다.


얼룩진 회색빛 고래.

오랫동안 보아왔던 그 고래가 확실했다.

한쪽 눈이 사라진 그 고래.


그림 속 여자의 눈은 바로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그 눈과 마주치자 재수는 몸 전체를 훑고 지나는 전율을 느꼈다. 그림에는 노란색 편지가 함께 동봉되어 있었다. 재수는 편지에 적힌 글자를 하나씩 천천히 읽어 나갔다.

- 친구. 오랜만이네.

지난 일 년 동안에 갑자기 내 꿈에 커다란 고래가 나타났다네. 고래는 매우 덩치가 큰 것이었는데 특이한 점은 한쪽 눈이 없다는 거였네. 나는 꿈을 깨자마자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림이 완성되고 나서 불현듯 자네가 떠올랐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 그림을 자네한테 보내야 할 것 같아. 자네는 고래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닐 테지. 떠오른 대로 그린 것인데 그림 속 여자가 세드나라고 이곳 원주민이 내게 말하더군.


내가 그에게 물었지. 세드나란 어떤 여자냐고? 그랬더니 그가, 세드나는 고래를 잉태하는 여자라고 말하더군. 그때 나는 참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

혹시, 자네는 이 세드나라는 여자에 대해 알고 있는가?







“세드나. 세드나...”


재수는 편지를 읽은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같은 말을 되뇌었다.


세드나는 이누이트 부족의 신화 속 인물로, 아버지와 단둘이 살아가고 있었다. 매력적인 외모의 그녀는 바닷새의 꾀임에 속아 잘못된 결혼을 하게 되고, 아버지와도 헤어지게 되었다. 세드나의 아버지는 1년 동안 사라진 딸을 찾아 헤매다 결국 딸을 찾아 바닷새의 나라를 탈출하게 되지만, 바닷새의 횡포로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세드나의 손가락들이 잘려나가게 되고, 그 잘려 나간 손가락 마디에서 고래가 태어났다고 한다.

다시 말해, 이야기 속 세드나는 고래를 잉태한 여자였던 것이다.


생각의 고리를 연결해 나가던 재수의 눈이 별안간 커졌다. 대기권을 뚫고 지구 위로 떨어지는 소행성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그 다음 단계에 대한 해답’이 재수 앞으로 툭 떨어졌기 때문이다.


“세드나... 나는 세드나를 찾아야 한다.”


그렇다.

재수는 이제 사라진 고래를 찾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그가 고래를 잉태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다음 단계에 대한 해답’으로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재수는 그의 저택으로 몰려드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사로잡을 단단한 끈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이룩한 비밀스런 왕국 안으로의 초대였다.

대저택에서 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회색빛의 돌벽으로 둘러싸인 건물이 올라갔다. 하늘을 찌를 듯 오르는 그 돌탑 안으로 사람들의 기도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곳을 ‘교회’라 불렀고, ‘구원’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는 신도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말솜씨와 결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가진 마음의 약한 부분을 알아채고, 그것을 지렛대 삼아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회색 교회의 신도들은 걷잡을 수 없이, 그 수가 늘어났다. 다양한 경로로 엄청난 재력과 권력의 냄새를 맡은 이들도 삽시간에 교회로 몰려들었다. 설탕물을 피해 갈 개미 떼는 없을 테니까. 어떤 식으로든 재수에겐 득이 되는 일이었다.

재수는 붉은빛으로 둘러싸인 방 안에서 수백 대의 CCTV화면을 바라보고 있다. 저택 일부와 회색 돌탑 교회 안의 모습이 화면에 다양한 각도로 담겼다.


이제는 누가 보아도 완벽한 노인의 모습을 한 재수가 13번,14번,15번 화면을 집중해 본다. 세 개의 화면 안으로 수많은 젊은 여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들은 누군가 자신을 지켜본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체, 기도하거나 누군가와 즐겁게 대화하거나 몸을 씻거나 음식을 씹어 삼킨다.


“ 흠 꿀꺽. 흠...”


거친 숨소리와 침 삼키는 소리가 불규칙하게 들린다.


재수는 엉켜진 수풀 더미에서 숨을 죽이고, 영양 한 마리를 기다리는 늙은 사자와 같았다.


‘바로, 이것이다! 세드나.’


느낌이 강렬하게 그를 사로잡는 순간, 재수는 책상 가장자리에 있는 빨간 버튼을 누른다. 지시사항이 전달되고, 그다음 절차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다.


선택된 여자는 안내원의 지시에 따라 회색문 안에 있는 수족관 방으로 이동되었다.




1981년 6월 17일


지난 일 년간, 여든아홉 번의 교접이 있었다. 그중 열 명이 임신을 했으니 임신에 대한 성공률은 10퍼센트 언저리였다. 그러나 팔십에 가까운 재수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이는 놀라운 일이었다. 임신 한 여성 중 두 명이 출산을 했고 모두 아들을 낳았으며, 나머지 한 명은 올해 겨울에 출산이 예정되어 있다. 그 외, 나머지 일곱 명은 모두 유산을 했다. 태어난 아이들을 통해 그 모체가 세드나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었다.

그녀 중 누군가가 ‘세드나’가 맞다면, 아이의 몸에서 재수만이 맡을 수 있는 그 특유의 향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런 아이는 없었다.


재수는 이제 하루 중 거의 대부분을 붉은 서재 방에서 보냈다. 때로는 그곳에서 단 1분도 나오지 않는 날도 더러 있었다. 검푸른 바닷속에서 자신을 빤히 노려보는 세드나의 그림은 왠지 모르게 그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그에게는 기댈 곳이 필요했다.


고래가 빠져나간 버린 그의 육체와 정신은 빠른 속도로 하루가 다르게 황폐해져 가고 있었다. 온몸을 단단하게 붙잡고 있던 근육들이 모두 빠져 버리고 앙상한 팔과 다리만이 남았다. 그리고 얼굴부터 목 아래로 가슴, 뱃가죽, 허벅지 살들이 경쟁하듯이 밑으로 쳐졌다. 볼 가죽은 안으로 푹 꺼져 있었고, 눈 밑은 텅 비어 버린 것처럼 시끄묵죽죽했다. 어깨는 안으로 말리고 등은 하루가 다르게 굽어지고 있었다.


근래에는 격렬한 교접 후, 호흡곤란이 오거나 혹은 팔다리에 마비가 온 적도 있었다.


그런 날에는 반드시 시꺼먼 바다 위에서 하얗게 피어오르는 안개 속에 갇혀 몸 위로 물기둥이 쏟아지는 환시에 시달렸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의 얼굴을 한 재수는 버튼을 눌러 치원을 불렀다. 잠시 후, 방 안으로 한쪽 얼굴을 검은 머리칼로 가린 아름다운 청년이 들어왔다.


“가까이 와서 내 몸의 냄새를 맡아봐라.”


치원은 가까이 다가가 재수의 몸에 코를 갖다 대고 숨을 들이마셨다.

“사실대로. 어떤 냄새가 나느냐?”


재수가 물었다.

“특별한 냄새는 없지만, 물 냄새가 조금 납니다.”

치원의 대답에 재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 지금 나한테선 죽은 달팽이 냄새가 나. 일주일 전부터 부쩍 심해졌어.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고 수십 마리가 비 오는 날 한꺼번에 죽은 냄새야. 축축하고 고약한 냄새. 썩은 바닷물 냄새.”


재수는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자신의 팔과 손바닥을 들여서 올려 보였다.

“거기다가 이걸 보아라. 지금 내 피부에 묻어나는 것들을. 미끈거리고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은 것들을. 물기둥 때문이야. 그게 너무 무서워. 한 번도 물을 무서워한 적이 없는데.”


라고 말하며 죽은 나뭇가지 색을 띤 오른쪽 팔을 꼬집어댔다. 그러나 뼈 부위를 따라 타고 올라온 검버섯 몇 개만 보일 뿐, 노인의 팔은 물방울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그는 무너져가고 있었다.


신을 초월했던 그는 사라지고, 초라하고 볼 폼 없는 노쇠한 몸뚱이만 남아있었다.


치원은 어렸을 적 그 모습 그대로, 말없이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그러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재수는 불에 덴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안 돼. 절대로. 그들은 나를 노망난 무지렁이로 취급할게다.”

“재단에 있는 의사는 절대 어르신께 무례하게 대할 수 없습니다.”


치원은 고개를 조금 숙이고 다시 엄숙히 말했다.


“흥! 내 앞에서 듣기 좋은 말로 꾸며대겠지. 뒤돌아서선 정신병자라고 조롱할거야. 예전이 었다면 그자들이 진짜로 하는 말을 속속들이 알아듣고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 내가 가지고 놀던 똥개새끼들이 내 머리 위로 기어 올라오는 기분. 너는 아는가?”


휘몰아치는 분노에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자신의 몰락을 결국 인정하고야 마는 초라한 자기 변론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재수는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래전에 들렸던 소리들이 들리지 않으니 미칠 노릇이군. 진짜와 가짜를 알 수가 없어.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조차 모르겠군. 과연... 세드나가 있기는 한 걸까?”


그의 푹 꺼진 눈꺼풀에 촉촉이 물기가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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