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번째 이야기
1975년 1월 3일
두 사람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아무도 없는 백사장 쪽으로 한참을 내려갔다. 반지르르하게 윤이 나는 재수의 구두 위로 모래 먼지가 묻었다. 그들은 파도가 닿는 모래사장 아랫부분까지 가서야 멈추었다.
소년은 재수의 오른쪽편에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섰다. 살을 에는 바람 때문에 소년의 흰 얼굴이 유리알처럼 창백해져 실핏줄이 보일 지경이었다. 두툼한 안대는 소년의 한쪽 눈을 가릴 순 있어도 그 기묘한 느낌까진 감출 순 없었다. 만약 신비스러움이라는 감정이 옷을 입고 다닌다면 그건 이 사내아이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재수의 시선은 계속해서 파도를 보내오는 바다 뒤쪽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몰려오는 파도 거품에 바지 아랫부분이 축축이 젖어 들어갔다. 그는 바닷물을 잔뜩 머금은 모래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왜일까?
이건 전혀 익숙하지 않은 장면이었다.
패배한 한 재수. 좌절한 한 재수. 굴복한 한 재수.
무엇하나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현실은 그에게 인정하고 그만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어린 치원은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참으로 말이 없는 아이다.
검정색 캐시미어 코트 아래로 물에 젖은 모래 덩어리들이 달라붙었다. 재수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그렇게 자신만의 의식을 치렀다. 두세 번의 파도가 덮치듯 스며들어 옷을 적시고 뒤로 물러갔다. 그러고 난 후 모래사장 쪽에서 한바탕 모래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소년의 길고 얇은 왼쪽 속눈썹 위로 모래 먼지가 달라붙었다. 재수의 등에도 달라붙은 모래 먼지들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흐느끼고 있었다.
“돌아와 주세요. 제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돌아와 주세요. 제발. 제발...”
그의 온몸이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바들거렸다. 스무 살, 다이지의 차가운 바다 위에서 기쁨의 환영처럼 떠오른 고래와 할아버지. 그때의 기억을, 일흔을 앞둔 재수는 더듬어 본다. 한쪽 눈이 사라진 귀신고래는 그가 선장의 손을 잡고 일본 땅에 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수십 년을 함께 했었다.
그들은 현실과 의식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공생했다. 그것은 마치 한 개의 자아가 자유롭게 동물과 인간의 몸을 넘나드는 형국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재수는 자신과 고래를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고래는 줄곧 재수에게 말했다.
“우린 함께다. 내가 있는 한 너가 있다. 너의 시대는 시작하겠지만 단계가 있을 거고 나는 그 단계를 알려 준다. 우리에 대한 너의 의무를 잊지 않고, 성스럽게 임한다면 너의 끝은 늦어질 것이다. 모든 것은 너에게 달려있다.”
메시지는 언제나 간결하고 정확했다. 고래를 접하고 나면 그의 몸 세포 하나하나가 새로 태어난 것처럼 짜릿했다. 그리고 발바닥부터 끌어 올라온 지구의 기운이 수 백 갈래의 혈관을 따라 휘돌면서 그 기쁨에 몸 전체가 파르르 떨리곤 했다.
가장 놀라운 점은, 고래의 멜론을 통해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그 욕망이 생생히 들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신(神)은 머리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의 마음을 알고 얻는 일은, 인간 세상을 내 것처럼 주무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흔에 가까운 재수는 의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강인하고 젊은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막대한 재산과 권력에 꼭 아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그를 직접 만난 이들은 재수의 나이를 제대로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그의 동년배들과 점차 격차가 벌어지더니 급기야 아버지와 아들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그랬던 그가 메뚜기 떼의 습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모든 생기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일 년 만에 풍성한 흑발이 하얗게 변했고, 탄탄했던 몸의 근육이 눈에 띠게 줄어들었다. 팔과 등에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한 검버섯이 얼굴까지 기어 올라와 오른쪽 뺨을 뒤덮기 시작했다. 사실, 사람이 나이가 들어 늙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연의 질서다. 그러나 그 질서라는 것이 재수에게는 완전히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오랜 시간, 세상의 질서는 그가 만들고 선택하는 것뿐이었다.
완전히 빠져나간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을 가득 채우고 있던 고래가 떠나버렸다.
고래로부터 어떤 메시지도 받지 못한 그는 극도로 불안해졌다.
불안은 재수를 어리석게 만들었고, 그를 맹목적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자신과 고래의 접점’을 찾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샅샅이 뒤졌다.
울산 장생포항도 그런 곳 들 중 한 곳이었다.
재수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아직 늙은이가 아니다. 난 아직 쓸 만하다. 내 가치를 보여준다면 고래도 다시 찾아 올 거다.”
1978년 5월 3일
재수는 귀신고래를 찾기 위해 현상금 백만 원을 걸고 모든 신문과 잡지사에 광고를 내걸었다.그 중 1978년 5월 한 월간 잡지 글에 실린 글이다.
“한국 귀신고래의 사진은 살아있는 고래를 찍은 것이든, 죽은 고래를 찍은 것이든 문제가 되지 않지만, 1974년 이후에 찍은 것에 한합니다. 귀신고래를 찍을 수 있는 요령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귀신고래는 등지느러미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큰 고래 가운데 등지느러미를 갖고 있지 않은 고래는 흑고래, 북극고래 정도로서 모두 한국 연안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에서 살고 있으므로 등지느러미가 없는 큰 고래는 일단 귀신고래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광고를 보고 몰려들었다. 당시 걸었던 현상금 백 만 원은 절대 작은 돈이 아니었다. 그들이 찍어 온 고래 사진들 중에서는 재수의 잃어버린 귀신 고래는 없었다.
때때로 고래가 아닌 물범 사진을 찍어오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애석하게도 머리까지 나쁜 사기꾼들이었다. 그러나 재수는 그의 비서들에게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그들에게도 약속한 현상금을 내어 주라고 지시를 내렸다.
재수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하루종일 응접실과 비밀스럽게 연결된 서재 안에 들어앉아 수십 대의 CCTV화면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대저택에는 여러 고래에 관한 사진, 이야기, 정보 등을 전달하여 조금이라도 돈을 뜯어가기 위해 모여드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들은 처음엔 으리으리한 저택에 감탄하였다가 후한 보상금을 받고 나서는 재수를 신과 같은 인물로 찬양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더 흐르자, 고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도 저택으로 모여 들었다.
재수는 그간 고래와의 합일을 통해서 세상이 돌아가는 데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 몇 가지 중 확실한 것은, 바로 ‘군중의 힘’이다.
늘 고래는 재수에게 “사람이 모이면, 그 파장으로 얼마든지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가 있다.”라고 말했었다. 서재는 사방이 붉은 벨벳 천으로 감싸여져 있었다. 고풍스러운 로코코풍의 디자인으로 설계된 방의 한쪽 벽은 수백 권에 이르는 고서로 뒤덮여 있다. 그 옆으로 15세기 후반이 대항해 시대를 누빈 범선부터 증기선, 각종 시대를 거스르는 포경선 모형들이 일렬로 진열되어 있다. 재수는 그 방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선채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저택 안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그다음 단계에 대한 해답이 그에겐 필요했다. 그때였다.
- 똑똑
밖에서 서재를 통하는 두 개의 문 중 수행원이 대기하는 방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하나는 응접실로 바로 연결되는 문이다.
“들어와.”
3초 정도 흐른 후 문이 열렸다. 정갈한 외모를 가진 남자 수행원이 베이지색 크래프트지에 감싸진 물건을 가지고 들어왔다. 180cm가 넘는 수행원이 들기에도 버거울 정도로 물건의 크기는 꽤 크고 납작했다.
“뭔가?”
“북극에 있는 친구 분께서 보내 온 선물입니다. 그림입니다. 보안 검사도 끝냈습니다.”
‘북극에서 그림을?’
“알겠네. 두고 나가보게.”
재수의 말이 끝나자 남자 수행원은 그것을 고서가 쌓인 벽 맞은편에 안전하게 기대어놓고, 인사를 한 후 방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