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치원의 출생

열여덟번째 이야기

by 오 광년


역사의 지도를 펼쳐보면 그것은 조금씩 연결되어 있다.

재수는 일본의 패망, 조선의 광복, 한국 전쟁 등 굵직한 역사의 파도를 요령 있게 넘어왔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라 말했지만, 사실 그건 재수에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의 왕국 안에서 국경의 경계는 허물어졌고 돈과 권력의 지도가 새롭게 짜여졌다. 고래와의 은밀한 만남은 계속되었으며 그를 가로막는 장애물 따윈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다.


1975년 1월 3일


1975년의 겨울은 유독 길고 추웠다.


울산만의 동쪽 해안가를 끼고 달려오던 고급 세단이 후미진 장생포항 언저리에서 멈추었다. 이른 새벽녘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항구 내에는 여기저기 거대한 원유 탱크가 도사리고 있었고, 뒤쪽에는 정유공장, 삼양제당 등 크고 작은 공장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바닷가 마을은 점점 회색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일출이 아름다운 곳이지만, 오늘은 날을 잘못 정했다. 하늘은 녹슨 철문처럼 우중충하기만 했다.

황토색 잠바를 입은 운전기사가 차에서 내려 익숙하게 뒷문을 잡아준다. 차문이 열리고 검정색 캐시미어 코트를 입은 재수가 차에서 내리며 말한다.


“자네는 여기 있고. 치원이는 따라오거라.”

세월의 흐름이 정직하게 묻어 있는 재수의 얼굴. 은발의 머리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고, 눈가에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지만 날렵한 이목구비는 그대로다. 안으로 쑥 들어간 눈꺼풀에 어둠이 짙다.


재수의 뒤를 따라 두툼한 갈색 외투를 입은 한 소년이 차에서 내렸다. 열살 가량으로 보이는 소년의 이름은 ‘한치원’이었다.


한 치 원.


치원은 고래가 말한 그 완벽한 시점에 세상에 태어난 아이였다. 당시, 주리는 통영의 ‘생활원’이라는 정신병원에 있었다. 그리고 그날, 주리의 담당자로부터 재수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곳과 연이 닿은 후에 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 여보세요. 회장님. 생활원 원장입니다.

“아, 말씀하세요.”


분명, 별일 없다는 안부의 전화는 아닐 것이다.


- 사모님에게 일이 생겼습니다.

“ 죽었습니까?”


주리는 의학적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거대한 혈혹을 오랫동안 머리 안에서 키우고 있었다. 그녀의 뇌 모양은 비정상적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머리 뒤통수가 눈에 띄게 불룩해졌다. 주리의 죽음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아... 그건 아닌데요. 이걸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하 참... 그게.


사망 소식이 아니라면 과연 그는 어떤 일로 전화를 한 것일까? 전화선을 통해 남자의 불안한 감정들이 고스란히 재수의 귀로 전해졌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고 미세한 조각들로 나누어져 재수의 혈관과 신경 조직으로 퍼져나갔다. 눈동자가 갑자기 미세하게 흔들렸다.


“ 혹시... 아기가 있습니까?”


재수는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전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상대방 쪽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놀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후,


- 아시고 계셨던 겁니까? 아아...니,아니. 회장님.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사모님은 이미 5년 전부터 이곳에 계셨고, 그동안 외부의 누구와도 어떠한 접촉도 없으셨습니다. 정말 이건 제 의사 명예...아,아니 제 목숨을 걸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겁니다. 저희는 사모님 보안에 관해서는 특별히 더 신경을 썼습니다.

재수는 테이블 위에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올려놓고 번갈아 두드리기 시작했다. 피아노 건반을 하나씩 건드려 보는 것처럼.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론 전화기를 든 채, 갑자기 바보가 된 것처럼 횡설수설하는 의사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는 두려운 것이다. 자신의 병원 사람 중 누군가가 거물 회장의 정신 나간 아내를 건드린 것은 아닌지. 원장이 해명하고 싶은 점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김 원장, 아내가 병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임신이 불가능한 신체 나이였다는 건, 나도 알고 있습니다.”

재수는 간단하게 그 부분을 긁어주었다. 이번엔 즉각 반응이 날라 왔다.


- 네네!! 회장님.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그겁니다. 아...물론... 곧바로 임신 하신 걸 눈치 채지 못한 저희의 부주의를 용서해주십시오.

“알겠소. 지금 출발하겠소. 아이는 내가 데려오겠소. 1시간 안으로 도착할 것이오.”

- 아!! 그런데... 회장님,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또 뭐요?”

-사모님께서 아이를 숨겨놓으신 채로 죽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저희가 응급처치를 하긴 했는데, 아이의 상태가...

“많이 심각한 거요?”


재수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 생명에 지장은 없습니다. 회장님. 그런데 얼굴 부분이 좀 심하게 다쳤습니다...

“일단 가서 확인합시다.”


굳은 얼굴로 전화기를 끊는 재수. 재수의 맞은편에 서 있던 검은 양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무전기에서 입을 뗀 후 “헬기 대기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통영, 생활원 주리의 병실 안)


헬기는 생활원 옥상 위로 신속히 착륙했다. 생활원 원장과 두 명의 의사, 세 명의 보호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의 안내를 받으며 재수와 그의 수행원 둘은 탁한 녹색 빛이 발하는 병원 복도를 걸었다. 무게감 있는 구둣발 소리들이 엄중하게 복도 안을 울렸다.


복도 끝에 원장실 문이 보였다. 오래되고 낡은 시골 병원과는 어울리지 않게 고급스러워 보이는 문짝이었다. 원장실 안으로 연결된 비밀스러운 방안에 아기 침대가 있었다.


그 안에 얼굴 반쪽을 붕대로 감고 있는 자그마한 신생아가 누워있다. 재수는 엄지손가락으로 앙증맞게 오므리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손을 쥐어본다. 촉감이 말할 수 없이 부드럽고 좋은데 이상하게 심장이 저릿하게 아팠다. 별난 일이다. 그때 재수의 나이, 쉰아홉이었다.

“조금이라도 늦게 발견되었으면... 장담할 수 없었을 겁니다. ”


얇은 금색 안경테를 끌어올리며 원장이 말했다. 목숨이 붙어 있으니 붕대 감은 것 정도는 이해하길 바란다는 어투로 들렸다. 재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하늘색 포대기에 감싸진 아기를 안아 올렸다. 방 밖으로 나가려는 재수를 바라보며 원장이 말했다.


“사모님은...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아직 살아계십니다.”


재수는 품에 안긴 아기를 수행원 한 명한테 맡기며 말했다.


“아기를 데리고 먼저 헬기로. 서울 닥터 황에게 연락해놔.”


재수는 원장에게 고개를 돌려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마지막 인사는 해야겠죠. 그 사람은 어딨습니까?”

“네, 아래층입니다.”


비상구 계단으로 한 층을 더 내려가 모퉁이를 돌고 청동색 철문 앞에 섰다. 그쪽 복도에 있는 문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원장은 익숙하게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신중한 자세로 문을 열었다.

덜커컥컥끽-


귀 안으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분 나쁜 소리였다. 복도보다 어둑한 방 안은 꽤 널찍한 크기였다. 방의 3분의 2정도 되는 지점에 철장이 버티고 서 있었고, 철장 사이의 간격은 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았다. 안에는 조악하기 그지없는 낡은 침대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죽은 짐승이라도 있는 걸까?


아까부터 풍겨오던 쾌쾌하고 비릿한 냄새가 더 강하게 느껴졌다. 그 냄새의 근원지는 철장 안, 낡은 침대 아래 그림자처럼 널브러져 있는 늙은 여자였다.


재수의 아내, 주리였다.


그동안 얼마나 잔인한 일들이 그녀에게 일어났던 것일까?


“혼자 있고 싶소.”


재수가 주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 ...회장님.”

원장이 난처하다는 표정을 잠시 짓자,


“1분.”


재수가 강한 어조로 짧게 답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뒤에 서 있던 보호사 둘과 수행원, 그리고 원장이 자리를 피했다.


“ 한. 재. 수우-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한 목소리가 철장 안에서 흘러나왔다. 사람의 말을 흉내 낼 줄 아는 괴수의 소리처럼 듣기가 고약했다. 미간을 찌푸린 재수가 두 손을 앞으로 포개 선 채로 답한다.

“어리석은 짓을 할 뻔 했더군. 내 자식을 죽이려 했어.”


말이 끝나자마자, 사방의 벽을 긁어버릴 것 같은 날카로운 웃음이 터졌다.

“까-악악캬...카 카-- 깍 ”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아니면 죽어가는 것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바닥에 머리를 댄 채, 웃던 주리는 갑자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머리카락이 모두 빠져버린 뒤통수에는 연회색의 살점이 두텁게 붙어 덜렁거렸다. 고개를 돌려 재수를 바라보는 주리, 그나마 남은 살가죽이 얼굴뼈를 감싸고 그 안으로 깊은 주름이 밀물처럼 퍼져 있었다. 시커먼 핏자국이 들러붙은 입주변이 떨리듯 움직였다.


“내.. 몸 깊은 곳...으로 고래가 뚫고 머리 위로 빠아...져나갔...어... 내가 낳은 ...건 그으..러니깐..... 괴..물..이라고.. 너 같은... 물어뜯어...죽여야 돼....”


빠져버린 이 사이로 침방울들이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재수는 마지막으로 철장 안을 쳐다본 후 뒤돌아 방을 나갔다.


문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원장이 가까이 다가왔다. 보호사가 재빠르게 문을 잠그고 그 틈으로 괴물의 울부짖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원장의 눈을 짧게 마주치고 재수는 말했다.


“저 사람의 일은 이제 끝났소. 마무리는 당신이 알아서 해주시오.”


재수는 서둘러 복도를 빠져나갔고, 그 뒤를 수행원이 빠르게 좇았다. 복도를 울리는 구두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원장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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