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재수의 시대(2)

열입곱번째 이야기

by 오 광년



1926년 1월 20일


열흘이 지났다.

겐토가 말없이 집을 나간 후로 열흘이 지났다.

겐토의 아내와 주리, 재수가 한자리에 모여 앉아있다.


“며칠 밤 동안 편하게 주무시질 못했어. 말씀하시진 않았지만, 뭔가 큰일이 있으셨던 게 분명해.”


라고 겐토의 아내가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실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약하게 떨리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주리는 말했다.


“엄마,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너무 걱정마세요. 사람들이 찾아보고 있으니깐, 곧 소식 들을 수 있을 거야. 답답하신 일이 있어서 훌쩍 여행 가셨을 수도 있잖아요?”


주리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라고 억지로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러나 정작 자신도 자신의 말에 확신이 서지 않는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으셨던 분이었다. 시선을 돌려 옆에 앉은 남편, 재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굳게 입을 다문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도 재수가 옆에 있어서 안심이 돼. 하지만 재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주리는 갑자기 궁금증이 일었다. 어려운 상황에 그가 곁에 있는 건 큰 힘이 되었지만, 재수는 마치 아무런 걱정도, 상관도 없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첫날밤 일 이후로, 재수에게 크게 실망했지만, 주리는 아직 그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남아있었다. 아버지가 사라진 지금 이 순간도, 자신은 재수에 대한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한심했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잘게 흔들었다. 그런 주리의 손을 재수가 따뜻하게 감싸 쥔다. 주리가 조금은 놀란 눈으로 재수의 옆얼굴을 쳐다본다. 날이 선 콧날 위로 움푹 파인 상처가 부각되어 보였다. 어쩌다 다친 걸까? 며칠 전에 생긴 상처가 재수를 볼 때마다 자꾸 거슬렸다. 주리의 가슴 속 어딘가에서 물음의 싹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아무렇지 않게 재수가 고개를 돌려 주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조용한 시선을 피부로 느끼자 주리의 얼굴에 갑자기 열감이 들었다.


실로 그런 눈빛은 오랜만이었다. 주리는 그 물음의 싹을 피우는 일을 잠시 멈추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 해변가로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이 파도에 떠밀려 왔다. 겐토의 아내는 그것을 ‘자신의 남편, 겐토’라고 하며 오열했다. 그 뒤에 서 있던 주리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재수는 이 모든 상황을 덤덤히 지켜보았다.


시신은 아키야마 가족 묘지의 사찰로 옮겨졌다. 엄중하고 무거운 장례 절차가 순서대로 이루어졌다. 정돈된 시신 위로 새 이불이 덮어지고 그 위로 고급스러운 무늬를 가진 관 뚜껑이 닫혔다. 관 뚜껑은 겐토의 아내, 딸 주리, 그리고 재수가 함께 들고 옮겼다. 그렇게 작별인사도 없이 아키야마 겐토의 시대가 끝이 났다.





모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5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재수는 아시아 제일의 대포경 군단을 이끄는 주인이 되었다. 그는 마치 오랫동안 이 순간을 준비해온 사람 같았다.


뛰어난 사업 수완과 사람을 다루고 관리하는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바다 위에서 고래를 찾아내고 다루는 그의 능력은 거의 신의 경지에 가까웠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그의 선택과 판단은 한 번도 틀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함께 배를 탄 사람이라면 무조건 그에게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


재수가 겐토의 친자가 아니고, 일본인이 아니며 심지어 조선인이라는 출생 신분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바다에는 영토의 경계가 없으니까.


무엇보다 그에게는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의 정확한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겨울이 끝나고, 다시 봄이 오는 것처럼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존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재수의 아내, 주리만은 예외였다. 그녀는 매일매일 풀리지 않는 그 의혹들을 부지런히 키워나가고 있었다.


“당신, 그러다가 일본 땅을 전부 사버리겠어요?”


주리는 푹신한 부추 달걀말이를 젓가락으로 찌르며 말했다. 맞은편에 앉은 재수는 별 대꾸 없이 가다랑어포찜에 올라간 완두콩을 덜어내고 있다. 두 사람이 식사하기에는 너무나 넓고 웅장한 공간이었다. 안주인의 심기가 불편함을 눈치를 채고 부엌과 연결된 문 앞에 서 있던 두 명의 하인이 자리를 피했다.


“이제 얼마 안 있어 당신 꿈을 이루겠군요.”


주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한다. 적당히 식은 우롱차를 삼킨 재수가 물었다.


“내 꿈이 뭔데?”

“고래를 팔아넘긴 돈으로 세상을 몽땅 사버리는 거죠.”

“별 헛소리를 다 듣겠군.”

“내가 정곡을 찔렀나요? 당신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인데...”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당신만, 남의 생각을 안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전부는 아니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어느 정도는... 나도 알고 있으니까.”


재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정면에 있는 아내를 마주 봤다. 헝클어진 머리에 홀쭉한 뺨, 안으로 푹 들어간 채로 날카롭게 빛나는 두 눈. 주리는 그간의 세월 동안 몰라보게 변해있었다. 일 년 전, 그녀의 어머니마저 갑자기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한 가닥 남은 낙천성마저 던져버렸다.


재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내가 있는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주리는 자리에 앉은 채로, 서 있는 재수의 얼굴을 당당히 노려보았다.


“당신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너는 미쳤다는 거야.”


주리의 말을 듣고 재수의 입가에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상황에 맞지 않는 감정은 오히려 모욕에 가까웠다. 그는 얼굴을 여자 쪽으로 좀 더 가까이 들이밀며 속삭였다.


“뭐라고 그런 거지. 당신.”


주리는 조금도 겁먹지 않고 입 모양을 또렷하게 보이며 말했다.


“너는 미쳤어. 이 미친놈아!”


재수는 오른손으로 주리의 양쪽 턱을 꺾어버릴 기세로 강하게 돌려 잡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통에 일그러진 주리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다.


“미친 사람은 내가 아니고 너야. 주리. 아직도 네가 부잣집 외동딸이라 착각하는 거냐? 제발. 현실을 직시하라고. 벌레처럼 바짝 엎드려 살아남아야지. 너 하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너도 모른다고는 하진 않겠지?”


분노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주리는 하얗게 치켜뜬 눈으로 그의 얼굴을 할퀴었다. 그녀는 재수의 콧날 위에 작은 부메랑 모양으로 남겨진 흉터 자국을 응시하다가 잘 벌어지지 않은 입으로 피를 토해내듯 말했다.


“윽윽...넌...내 아버질... 주..죽였어..윽”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재수는 주리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을 옆으로 비틀고 뒤로 확 밀어버렸다. 그 바람에 병에 걸린 개처럼 주리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의자에 앉은 채로 뒤로 고꾸라졌다. 쿵- 머리가 심하게 바닥에 부딪히고 허리가 튕기듯 꺾였다. 꽤 요란하게 소리가 났지만,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여자의 얼굴은 시뻘겋게 피가 쏠리고 움푹 들어간 양 볼에 시퍼런 자국이 생겼다.


여자는 “헛, 헉-” 하고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한쪽 손으로 허리를 부여잡고 일어섰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양, 그녀는 맞는 일에 꽤 익숙해 보였다. 그것은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렇지 않게 식탁에 놓인 냅킨을 잡아 오른손을 닦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잘라놓은 생선찜을 마저 먹기 시작했다.



혼인식이 있기 전날 밤,

바다 한가운데서 고래가 재수의 몸으로 들어온 직후부터였다.


재수는 자신 안에 또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것은 아주 거대한 크기의 고래였다.

고래로 인해, 자신은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들은 다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은밀한 공간에서 언제나 비밀스러운 만남을 이어갔다.



“아내를 없애 버리고 싶습니다. 다이지를 벗어난 지금, 더는 필요도 없고요.”

- 아니, 아니... 아직은 아니야. 여자의 일이 남아있어.

“그게 뭡니까? 그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겨우 제 심기나 건드리는 것뿐입니다.”

- 조급해하지 마라. 모든 걸 망치니까. 여자는 너의 자식을 낳을 거야.

“조선으로 돌아가 살고 싶습니다. 가족은 없지만, 내가 태어난 땅입니다.”

-그것도 조금만 더 참아. 아직은 때가 아니야. 완벽한 때가 오면 너한테 알려준다.

“그런데, 어떻게 그 완벽한 때를 알 수가 있죠? 어떻게 무작정 기다립니까?”

-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소리가 들리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보여. 그건, 아는 게 아니라 알 수밖에 없는 거야.

“능력...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정답을 알고 있는 네가 초조해할 필욘 없잖아?



방 안을 꽉 채우고도 모자람이 없는 고래는 한가운데 앉은 재수의 주변을 둥글게 감쌌다. 지하실로 연결된 좁은 통로로 낮게 몸을 엎드린 채 이 모습을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는 주리. 그녀의 눈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그녀는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두 손으로 벌려진 입을 움켜쥐고 콧구멍으로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떨리는 심장이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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