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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 예담 Aug 18. 2021

아버지는 내게 '삶'과 '무기력'을 물려주었다

이번 생에 해결할 수있을까?

고등학생 때 집에 돌아오면.. 


언제나처럼 아버지의 화난 고성이 나를 마중 나왔다.

 

아버지는 혼자서 야채장사를 하며 3남매를 먹여 살렸다. 장사를 하며 이상한 고객에 시달렸기 때문일까,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를 향해 분노를 자주 표출하셨다. 고성을 치기 일쑤였고, 가끔씩은 어머니가 차린 저녁밥을 엎기도 했다.


아버지가 화를 낼 때마다 우리 삼 남매는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처했다.

첫 째 누나는 똑같이 소리치며 적극적으로 아버지에 맞섰고, 둘째 누나는 곁에 앉아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막내인 나는 방 안에 숨어 아버지의 화가 잦아들기만을 무기력하게 기다렸다. 


첫 째 누나처럼 아버지와 적극적으로 맞서지도, 둘째 누나처럼 어머니를 위로하지도 못했다. 그냥 지금의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한 번은 아버지에게 맞섰다. 왜 그렇게 소리를 치냐고, 좋게 좋게 말하면 되지 않느냐고, 어머니에게 사과하라고.. 하지만 아버지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고, 오히려 나를 향해 분노 서린 눈빛과 목소리 쏟아냈다. 


어린 나에게 나보다 40 이상 많은 성인 남성의 분노는 뇌리에 각인될 만큼 공포스러웠다. 그리고 그 후 방에 조용히 숨어있으면, 적어도 나를 향한 아버지의 분노는 없었다. 그렇게 공포스러움에 물들어 방 안에서 얌전히 숨어있는 것이 나의 생존전략이 되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부모님 집에 내려가면 여전히 아버지의 고성이 나를 먼저 반긴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많이 바뀌었고, 많은 것을 이루었다. 독립하여 서울에 자리를 잡았고, 헬스로 몸도 키웠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말리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 성인 남성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아버지의 분노를 마주하면 10년 전 도피만이 유일한 생존전략이었던 때로 돌아간다.


예전에 방에 숨어들었듯이 지금은 서울로 도망친다. 도망쳐 나오며 나는 끊임없이 나를 비난한다. 

'이제 나는 성인 남성으로서 적극 아버지를 제지하고 어머니를 변호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

'아버지와도 잘 긍정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데, 다른 사회생활은 잘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고 도망치기만 할 것인가...'


나는 왜 이렇게 비겁한가... 또 왜 이리 무기력한가

사실 아버지가 아닌 그 누구라도 나에게 소리를 치는 갈등 상황을 겪으면 나는 항상 얼어붙고 도망친다. 어린 시절의 도피 전략이 지금의 내 삶의 기본 전략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갈등을 빚는 게 무섭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번져버렸다.  




미국의 심리학자 Seligman은 학습된 무기력 이론(Learned helplessness theory)에서 무력감을 학습하게 되면 우울증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 사람이 좌절 경험을 통해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도 좌절스런 결과가 돌아올 것이라는 무력감을 학습하게 되면, 더 이상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게 되는 무기력증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Abramson에 의해 절망감 이론(Hopelessness theory)으로 발전했는데, 절망감이 우울증을 유발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이때 절망감은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결과의 발생에 대한 부정적인 기대와 이러한 결과의 발생에 대한 무력감'이라고 정의된다. 나의 사례에 대입해보면 아버지의 분노는 긍정적으로 해소될 수 없을 것이고, 내가 어떻게 행동하더라도 마찬가지라는 절망감을 갖는다. 절망감으로 인해 나는 자기 비난에 빠지고, 대인관계 전반에 대한 무기력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충분히 성장해서 이제 아버지와 같은 어른이 되어서도 학습된 절망감이 나를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아버지의 고성과 유사한 상황이 다른 사람과 벌어졌을 때, 나는 똑같이 싸우지 못하고 도망치고 만다. 그리고, 왜 도망치냐고 나를 나무라고, 그 무엇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나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나는 아버지로 인해 무기력과 우울을 학습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를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학습의 결과가 너무나 강력하여 곧바로 아버지의 분노에 적극 대항하지는 못하고 있다. 대신에 우회적으로 세 가지 변화를 꾀하고 있다. 


1) 아버지와 평소에 대화하기
: 아버지에 대한 부드러운 이미지를 키우고,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을 편안하게 만들기 위해

2) 갈등 상황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기
: 공포와 무력감이라는 감정에 빠지기보다 상황 자체를 객관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대응하기 위해

3) 갈등을 회피하는 나를 더 비난하지 않기
: 갈등을 회피하는 것이 내가 무능력해서가 아니라 학습으로 인한 결과라는 것을 인정하고, 2차적인 고통을 막기 위해


이러한 변화를 통해 나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첫 째, 나는 더 이상 무기력하지 않다. 선택적으로 아버지와 소통할 수도 있고 상황이 너무 나빠지면 아버지와 적극적인 분리를 시도하고 더 이상 죄잭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둘째, 나에게 선택권이 있다. 지금까지 나는 가족 구성원들이 각자 자신의 역할을 해내지만 나만 그러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여리고 약한 어렸을 적의 내 모습이었고, 이제는 성인 남자로서 조금씩 변화한다면 나를 지키고, 나아가 누나와 어머니를 보호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셋째, 나는 받아들였다. 상황이 나에게 불리하였고 내가 무기력하게 된 것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자 죄책감은 줄어들었고, 변화를 위한 작은 시도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30년간 쌓여온 고름이 해소되기 위해 오랜 기간이 필요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긴 여정을 가야 하기에 단기 스프린트가 아닌, 걷기를 선택했다. 변화를 위해 한 발자국씩 걷다 보면 나아지지 않을까, 걷다 지치면 잠시 쉬고, 길을 이탈해도 된다. 정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길을 가지 않아도 좋다.


먼 길을 가야 하는 사람은 몸과 마음이 가벼워야 한다. 혹시 여러분도 어린 시절 부모님의 폭력에 상처를 받았거나, 성인이 된 이후에도 그 폭력이 재연될 때마다 무기력해지거나, 무기력해지는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가?


그렇다면, 내가 무능력해서가 아니라 어린 시절 배운 결과 때문이라고 이해해주는 것이 어떨까 싶다.



*이 글은 위윌 자조모임 정회원 호수님이 작성하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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