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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자 이조영 Jan 10. 2021

40년 전의 나에게 쓰는 편지

그해 겨울의 너에게

지금은 2061년 1월 1일이야. 어느덧 내 나이도 94살이 되었군. 올해는 유난히 지나온 인생을 더 돌아보게 돼. 언제 죽을지 몰라서 그런가 봐. 후후. 내년 새해를 또 맞을 수 있을지 기약하지 못하니 올해는 필히 너에게 편지로나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 특히나, 그해 겨울의 너에게 말이야.


2021년 1월,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그해 겨울 한반도에는 20년 만에 한파가 몰아쳤었지. 갑작스러운 눈으로 길바닥은 꽁꽁 얼어붙었고, 차가 움직이지 않아 밤새 귀가를 못한 사람들이 속출했었어. 그뿐인가. 코로나 19로 전 세계가 고통 속에서 끔찍한 1년여를 보내는 중이었지. 빌어먹을 코로나! 그토록 우려하던 바이러스의 시대가 오나. 드디어 인간의 몰락이 시작된 건가. 문명의 이기가 준 징조에 사람들은 연일 신음했어.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난 아직 이렇게 살아서 너에게 편지를 쓰고 있으니.


어쨌든 전 생애를 거쳐 결코 잊지 못할 시기였다는 건 분명해. 바이러스로 인해 모든 게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으니까. 하루아침에 자유를 빼앗긴 피난민이 된 기분이랄까. 소소한 일상이 얼마나 기적이었는지……. 그 기적을 매 순간 누리며 살면서도 감사하지 못한 걸 반성하는 자성의 소리가 높아졌지만, 그만큼 무력감도 느껴야 했어.

한마디로 소리 없는 전쟁이었지.

감염 방지로 사람이 모일 수 없는 환경에서 사람들은 위태위태한 하루를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어. 너만 해도 당장 하고 있는 글쓰기 코치와 심리 치유 세미나까지 지장이 많았잖아.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어. 그 후에도 코로나보다 더한 위협들이 우리의 삶을 흔들어 놓았거든.


그런데 유독 그때가 기억나는 이유는…… 바로 너 때문이었어.

어떤 어려움이 와도 맥없이 주저앉아 있지 않은 게 너였으니까. 넌 언제나 새로운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계획을 세우지. 그리고 계획을 실행하는 과정을 즐기는 데 탁월해. 내가 널 가장 사랑하고 인정하는 부분이 그거야.

새해가 되자 네가 제일 먼저 한 일이 뭐였는지 알아?

몇 년을 미뤄왔던 소설을 쓰기로 한 거였어. 계약하고도 쓰기 싫어 미적거리던 작품이었잖아. 근데 집에 있을 시간이 많으니 책 쓰기 가장 좋은 적기가 아니겠냐면서 흔쾌히 시작하더군.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과 공저를 했어. 공저라니, 지금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넌 그 두 가지 말고도 웹 소설 공모전을 구상 중이었고, 글쓰기 관련 책도 쓰는 중이었거든. 아무리 봐도 넌 글에 미친 게 분명해. 글 쓴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시들해졌다고 느꼈는데 전혀 아니었어. 오히려 글감을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 같았어.

 

넌 결국 그해 네가 목표하고 계획했던 일들을 하나씩 이루어 나갔어.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차고 근사한 아이디어들로 통통 튀었지. 마치 4차원의 세계 하나가 네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 같았어. 그때의 넌 처음 글을 쓸 때처럼 들떠 있었고 눈빛은 반짝반짝 빛이 났어.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아 입술은 늘 부르터 있었지만, 그 어느 해보다 열정적으로 글을 썼고, 글쓰기 수강생들을 가르쳤고, 심리 치유로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을 게을리하지 않았어. 그러면서도 뭔가 할 일을 계속 찾아냈지. 개구쟁이처럼 놀 거리를 만들고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린 채 한바탕 뛰어노는 삶. 내가 지금 이 나이까지 건강하게, 여전히 글을 쓰면서 사는 건 너의 식지 않는 그 순수한 열정 덕분이야. 고마워. 진심으로.


그런데 말이야. 죽음이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되고 보니 무언가를 목표로 삼고 계획을 세우고 성과를 이루며 사는 것도 좋지만, 끊임없이 상상하고 실제의 경험으로 이뤄내는 그 열정이 곧 목표이자 계획이고 성과였더라고. 그건 온 집안을 따뜻하게 해주는 연료와 같은 것이었어. 너는 삶에서 연료가 끊어지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최우선이었지.

그래, 마음. 넌 인간의 마음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어. 그때도 지금도.

2021년 새해 첫날, 네가 다이어리에 썼던 글귀를 아직도 보관하고 있어. 그 글귀는 매년 새해를 시작할 때마다 잊지 않고 다시 보곤 해.     

 

열정이 식으면 인생도 식는다.      


난 94세가 된 오늘까지도 40년 전의 글귀로 새해를 시작해.

그때의 네가 열정으로 한 해를 뜨겁게 보냈듯이, 잔주름 가득하고 행동마저 굼뜬 할머니인 나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한 해를 열심히 살려고 해. 어느 날 내가 눈을 감는다 해도 내 손에는 종이와 펜이 들려 있을 거야. 오래되어서 칠이 벗겨진 책장에는 그간 썼던 무수한 책들이 함께 해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겠지. 정말 멋진 죽음이지 않나?


나는 유명한 작가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하였으나, 글을 쓰는 동안 충분히 행복했고 즐거웠어. 글은 나의 가장 친근한 벗이었거든. 세상 친구들은 날 버려도 글은 내가 어떤 사람이든 함부로 버리는 법이 없었어. 그러니 너도 네가 하는 일에 미쳐서 살기 바라. 그게 삶을 사랑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니까.

안녕, 내년 새해에도 또 어느 날의 너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으면 좋겠어. 만약 그렇지 못하더라도 난 언제나 너와 함께였으며 너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다는 걸 잊지 마. 사랑해.      


추신 : 그해 공저했던 에세이와 계약했던 소설은 내 책장 다섯 번째 칸에 꽂혀 있어. 에세이는 지금도 가끔 꺼내서 읽어보곤 해. 그때 참 재미있었는데……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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