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자 이조영 Jul 28. 2022

인생을 바꾼 두 번의 군입대

육군종합행정학교 강연

수요일은 충북 영동에 있는 육군종합행정학교에 강연이 있는 날. 전날 늦게까지 ppt 준비를 했다. 날이 더워서 그런지 버퍼링이 걸린 듯이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군대 간부들 대상의 강연이라니 부담도 되고, 아들의 군대 이야기가 얼마나 동기부여가 될지도 알 수 없었다. 군대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그저 막연하기만 했는데...


영동에 내리자 서울과는 공기부터가 다르다. 더운 날씨였고 공기 또한 뜨거웠지만, 눈앞에 보이는 초록이들 때문이었을까. 코를 스미는 공기가 덥지만은 않았다.

강연은 1시 10분. 학교에 가기 전에 소령님과 하사님 두 분이 정씨함박이란 곳으로 데려갔다. 강연 전이라 부드러운 음식을 먹는 게 좋겠다며 전날 문자가 왔었다.

아담한 그곳에서 비주얼이 꽤 좋은 함박스테이크를 먹으며 담소를 나눴다. 육군종합행정학교가 어떤 곳인지 인터넷에서 찾아보긴 했으나, 소령님에게 좀 더 디테일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성남에 있던 학교를 충북 영동으로 옮겨서 건물과 시설이 좋아졌다고 했다. 실제로 보니 군대라는 느낌이 강하지 않았다. 산으로 둘러싸인 학교는 군복을 입은 군인들과 군대를 상징하는 내부만 아니었으면 군대라는 걸 모를 정도였다. 아마도 내가 군대에 익숙지 않아서일지도.


먼저 강의실을 둘러보고 ppt 확인을 한 뒤 학교장을 만나러 올라갔다. 오후에 행사가 있어서 참석을 못 하신다며 먼저 인사를 나눴다.

지인이 아니고서야 살면서 장군을 만날 일이 있을까. 별 모양의 커버가 있는 일인용 소파가 빙 둘러진 사무실. 앉아 있는데 현실감이 없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을까.



시간이 되어 강의실로 내려가니 군인들이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군복부에 대한 중요성과 동기부여에 대한 강의.

아들의 군입대 이야기로 파트 1을 시작했다. 떨릴 줄 알았는데 전혀!

내가 원해서 온 곳이었기에 그 자체로 의미 있었다. 잘하고 못하고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강연이나 강의든 간에 그 시간에 찐으로 동기부여를 얻는 사람은 한두 명에 불과하다. 100명이 모였다고 전부 동기부여를 얻는 건 아니다.


80분이란 시간 동안 무대 위에서 군인들과 눈을 맞추며 준비한 모든 걸 쏟아냈다. 각자 어떤 이유와 목표로 군인이 되었는지, 특히나 간부가 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 군인이 되겠다는 목표와 새로운 세상으로의 도전은 이미 이루었고,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나’ 자신에 한정되어 있고 한계를 느끼는 군인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나를 넘어서 ‘타인’으로 향하는 삶을 살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일반병사들이야 나라에서 부르니 간다고 해도, 간부들은 스스로 선택한 길이기에 그 책임감과 부담감이 크다. 과연 이 길이 맞는 선택인가 하는 갈등도 겪을 것이다.



아들은 군대에 가기까지 2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갑자기 강직성 척추염이라는 진단을 받았음에도 현역을 고집했다. 중간에 결핵 때문에 입소 3일 만에 돌아왔고, 그 후엔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 pt를 열심히 했다. 결핵을 치료하는 데만 9개월이 걸렸다.

그렇게 고군분투 속에 두 번째 입소를 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돌아오지 않았다. 별말이 없기에 군 복무도 무난하게 하고 있나 보다 생각했다. 제대를 앞두고 군대 행사에 초대받아 갔을 때 간부들이 아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처음엔 그냥 듣기 좋은 말인 줄 알았다.


FM으로 군생활을 한 아들. 그리고 부사관이 되게 설득 좀 해 달라는 말을 듣고 감개무량했다. 아들이 군에 간다고 했을 때만 해도 건강도 건강이지만 군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지를 더 걱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아들은 군대에서 많은 것이 달라졌고, 그 적정선을 찾는 사회성을 길렀다.

더욱 놀라운 건 군생활에서 했던 그대로 직장생활도 한다는 것이다.

남들보다 늦게 군입대를 해서 25살이 되던 1월 초에 제대했기에 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른 출근임에도 지각한 적이 없고, 성실하게 살고 있다. 올해 5월에는 제 힘으로 회사 근처에 집을 얻어 독립했다.


PPT를 준비하면서 아들을 인터뷰했다.

“현역을 꼭 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어?”

“이 정도로 아픈 게 군대를 안 갈 정돈가? 그런 생각이 들었고. 의사쌤이 소견서를 써주면 공익을 갈 수 있다고 하셨잖아. 근데 그렇게까지 해서 빼야 하는 게 싫었어.”

“그랬구나. 군대에서 배운 건 뭐야?”

“엄마도 알다시피 내가 성격도 모나고, 자의식도 강하고 이기적이잖아. 그랬던 사람이 군대에 가니까 개인이 없어지더라고. 단체를 먼저 생각하다 보니 희생해야 하는 것도 알게 됐고, 나중에는 그 상황을 수긍하게 돼. 그렇다고 너무 거창한 목표를 두지도 않았고,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나도 할 수 있구나’를 알게 됐어.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남들에게 피해 주지 말자는 생각으로 살았거든. 그 적정선을 찾아가다 보니까 그게 사회성을 배우는 거더라고.”

아들이 군대에 가지 않았다면 인생이 바뀌었을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사람은 새로운 환경 속에서 나 자신이 깨지고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군대라는 곳은 사람을 바꾸는 데 적합한 곳이다. 아들은 군대라는 환경과 수도 없이 부딪혀야 했을 상황을 수긍하며 새로운 자아를 만날 수 있었다. 수긍하느냐 수긍하지 못하느냐의 선택이 인생을 바꾼 계기였던 셈이다.


어렵게 갔던 군대. 2년이 넘는 그 시간 동안 남들 쉽게 가는 군대를 왜 내 아들은 이렇게 힘들게 가야 하나, 하는 원망도 있었다.

그러나 그 경험은 아들의 인생을 바꾸었고, 나 또한 간부들 앞에서 강연하는 날이 오게 되었다.

아들의 이야기를 글로 남기지 않았더라면 인생의 에피소드 정도로 묻혔으리라. 기록으로 남기자, 2년이 지난 지금 한 독지가의 추천으로 강연을 할 수 있었다. 내게도 책을 보내 주셨던 독지가님은 이 부대에도 책을 보내주고 계셨단다. 엽서를 내 페이지에 꽂아놓고, 군인들에게 큰 동기부여가 될 거라며 강력추천을 해주셨다고 했다.


글이 주는 힘이란 이처럼 강력하다. 또한 어떤 경험이든 자산이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좋은생각'에 글이 실리면 생기는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