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과 기대는 다 무의미하다. 마블의 끝은 어디인가
※ 스포일러가 많은 글입니다. 이 영화는 가급적 스포일러 없이 보셨으면 합니다.
영화 보신 분들이라면 마음 편히 내려서도 됩니다만, 안 보신 분들이라면 영화를 보고 보시는 것을 추천해드립니다 : )
마블이 [아이언맨 1]으로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포문을 연지 어언 10년이 되었다. 그 시간 동안 마블은 감히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히어로 영화의 강자가 되었다고 자부한다. 영화 [어벤져스:인피니티 워]는 10년간 마블이 쌓아온 것들을 모두 보여준다. 단언컨대 이 영화를 보고 난 직후 소름이 돋을 것이다. 나는 소름이 돋다 못해 멍해져서 내가 본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인지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세웠고, 마음속 준비를 위해 가능한 예상을 다 해봤지만, 이 예상도 기대도 철저히 부셔버린다. 모든 기대와 예상이 무의미했다. 이 영화는 그런 영화다. 마블 다운, 그러면서 마블을 뛰어넘은 영화다.
철저히 타노스의 시각으로
이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캐릭터를 꼽아보자면, 나는 단연 '타노스'를 꼽겠다. 타노스는 명실상부한 MCU 최고의 빌런이며, 지난 [어벤져스 1] 때부터 기대를 한 몸에 받은 빌런이다. 그리고 그는 역시나 어마어마했다. 말 그대로 최고의 빌런이 어떤 것인지 실감하게 해준다. 아이언맨도, 캡틴 아메리카도 단연 최고의 히어로들이지만, 타노스에 견주어 보자면, 약간은 모자란 감이 있을 정도다.
나는 이 영화가 그런 '타노스'의 시각으로 그려진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스토리는 간단하다. 타노스가 인피니티 스톤 6개를 모으는 과정, 그리고 그를 막기 위한 마블 히어로들의 투쟁이다. 그러니 어찌 보면 이 영화는 철저히 타노스의 시각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영화를 타노스의 시각에서 봤을 때, 타노스의 승리로 빚어진 완벽한 해피 엔딩이다. 그는 히어로라는 수많은 장애물들과 맞서 싸우며, 중요한 순간에 숭고한 희생도 마다했고, 결국 인피니티 스톤을 다 모아서 자신의 신념을 이룬 주인공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가 모든 그의 과업을 끝내고, 지는 태양을 바라보는 장면까지 이 영화의 마무리로 더할 나위 없다.
그동안 대부분의 히어로 영화가 당연하게 히어로의 입장에서 스토리가 전개되어 왔다. 빌런이 치명적이었던 DC의 영화 [다크 나이트]조차 조커의 시각이라기보다는, 배트맨의 시각에서 쓰인 영화였다. 다만 빌런인 조커가 돋보였을 뿐. 그러나 이 영화는 대부분의 장면이 타노스의 움직임에 따라 펼쳐진다. 타노스가 움직이는 대로 히어로들이 대응하는 느낌이랄까. 평소의 히어로 영화가 궁극의 악인 빌런을 무찌르기 위해 스토리를 리드했다면, 이번에는 타노스가 이 영화를 지휘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타노스는 꽤나 매력적인 빌런이다. 나의 마블 최애 빌런은 로키인데(사실 요즘은 로키가 빌런인지 의심스럽다. 안티 히어로 정도랄까.), 타노스도 로키만큼이나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빌런이라 좋았다. 그는 그저 궁극의 악으로 치부할 수 없는 신념 있는 빌런이다. 폭행과 살인을 일삼지만, 철저히 그의 신념에 입각한 행동만을 할 뿐이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그의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합리적이다. 한정된 자원과 늘어나는 인구 사이에서 그는 말 그래도 '합리성'을 추구하는 것뿐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당연하게 인지해오던 명제는 배제된 상태이다 ; 생명은 소중하며, 합리성이라는 명목 하에 좌우될 수 없다는 명제가 말이다.
이러한 명제 조차 타노스에겐 합리성이 결여된 억지논리에 불과한 것이다. 심지어 그의 효율성을 무시한 채, 이 억지 논리를 유지하던 그의 모성(母星)은 자원고갈로 끝내 멸망해버렸으니 말이다. 때문에 그는 철저하게 그의 과업만을 추구할 뿐이다. 자신이 나아가는 방향에 굳이 해가 되지 않는다면 살인도 없다. 영화 후반부에 완다를 살려둔 이유는 아마 그녀가 자신의 일을 조금 귀찮게 만들었을지언정, 자신의 목표에 그리 큰 타격을 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악으로만 치부하기엔 너무 매력적인 빌런이 맞다. 그래서 아마 이 영화는 그의 입장에서 그려졌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벤져스'인 이유
이 영화는 어마어마한 캐스팅에서부터 화제였을 만큼, 지난 10년간 마블이 보여준 거의 모든 히어로를 한자리에서 보여준다. 사실 아이언맨을 시작으로 캡틴 아메리카, 토르, 헐크와 같은 대다수의 히어로들이 이미 개인 영화를 여러 편이나 보여준 만큼, 영향력이나, 스토리 장악력, 캐릭터의 매력도가 어마어마하다. 히어로 한 명 한 명이 말이다. 이런 히어로들을 한 자리에 모은다는 것은, 일종의 복불복이다. 기존의 어벤져스 시리즈에서 처럼 어마어마한 시너지 효과를 줄 수도 있지만, 이번엔 심지어 히어로의 수가 기존 어벤져스 시리즈에 비해 두배 이상 늘어난 만큼, 지나치게 중구난방해질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안감을, 영화를 타노스의 시각에서 그리면서 감독은 아름답게 해결한다. 시간상, 스토리상의 이유로 히어로 한 명 한 명에게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영화를 통해 처음 마블을 접하는 관객이라면 다소 영화가 불친절할 수 있다. 그러나, 2012년 [어벤져스1]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타노스라는 빌런을 기대해왔던 관객이라면, 아니 그 이전에 2008년의 [아이언맨 1]부터 마블을 지켜봤던 관객의 입장이라면 이 영화는 그들의 매력이 과하지 않지만, 돋보인 영화라는 점에 동감할 것이다. 그동안 봐왔던 히어로들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그들의 매력이 더욱 부각된달까. 거기다 여러 개로 동떨어져 있던 세계관들이 하나로 모아지는 모습은 정말 전율이 흐른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세계관과 [어벤져스]의 세계관을 이보다 더 잘 이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오랜 시간 마블과 함께 해온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등은 물론이고, 최근 MCU에 합류한 닥터 스트레인지, 스파이더맨, 블랙팬서까지. 이렇게나 많은 히어로들을 깔끔하게, 어찌 보면 간단하게 보여주면서도, 한 명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 순간이 짧을 수는 있다. 하지만 매력은 충분히 돋보인다. 영화 초반부의 닥터 스트레인지와 아이언맨의 말다툼 부분이라던가, 중간 부분의 토르와 스타로드의 기싸움 등은 짧지만, 그들을 알아가기에, 그리고 그들의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이 덕분에 영화는 우왕좌왕하지 않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이 영화가 '타노스와 아이들'로 전락하지 않게 만들어준다. 이로 인해 이 영화는 '어벤져스'가 맞다.
어쩔 수 없이 생각나는 그 이름. DC.
영화를 보고 난 뒤, 소름을 다 추스르고, 내 머리 속 인지 부조화도 어찌어찌 정리한 후 들었던 생각은, '아 DC 어쩌지.'였다. 영화 [아이언맨]으로부터 MCU가 태동하기 이전의 시절에는, 마블이 DC를 따라 하네 마네 하는 소리를 들었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DC의 영화가 나오기만 하면 마블과 비교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언제나 이 대결 아닌 대결에서 승자는 마블이다.
[배트맨 대 슈퍼맨]의 참패를 딛고 작년 [원더우먼]으로 날개를 펴나 싶었던 DC가 [저스티스 리그]로 주춤하는 사이, 마블은 어마어마한 패를 내놓았다. [저스티스 리그]와 [어벤져스:인피니티 워]의 개봉 간격이 6개월도 채 안된다는 걸 생각했을 때, 이 간극은 좀 심각한 수준이다. 마치 DC가 겨우겨우 마블의 뒤꿈치가 보일락 말락 하는 때에 마블은 날아서 우주로 가버린 느낌이다. 이 간극을 어떻게 메워야 할지 DC한테는 충분히 멘붕일 것 같다. 이 수많은 히어로를 데리고도 깔끔하게, 그러면서도 충분히 매력을 보여준 이 영화와 달리, DC는 전작 [저스티스 리그]에서 고작 5명의 히어로를 데리고도 중구난방 하게 놀지 않았던가. 이것이 기획력의 차이인지, 아니면 대중의 몰매를 맞고 있는 감독의 역량 차이인지까지는 잘 모르겠으나 하나만은 확실하다. 마블은 이미 DC가 보이지도 않을 만큼 앞서가고 있으며, DC는 발등에 불 떨어진 상황이라는 것.
유일한 오점, 오역
이 영화에 흠 아닌 흠은 모두가 인정하겠지만 오역이다. 그동안 번역가의 만행도 그냥 스무스하게 넘기려고 했고, 실제로도 그래 왔지만(조금 부들부들하긴 했지만) 이번 오역은 좀 지나치게 심각하다. 메인 스토리의 희망에 절망을 끼얹어버렸다. 거기다가 타노스라는 이 신념에 가득 찬 빌런을 어쩌다가 학살도 자행하는 '그냥 빌런'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했다. 부디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꼭 오역을 찾아보시길 바란다. 닉 퓨리 효자설은 아무것도 아닐 만큼 이 영화의 오역은 참담하니 말이다. 정말 이번 영화야 말로 마블의 빌런이 '그 번역가'임을 실감할 수 있는 영화다.
내 기준, 히어로 영화 역사에 한 획을 그을 만큼 어마어마했던 작품이다. 그 어떤 예상도, 기대도 부질없다. 말 그대로 '상상 밖'의 스토리를 그린다. 빌런인 '타노스'의 시각에서 그려졌다는 점, 그리고 그 빌런 타노스의 매력의 측면에서 인상 깊었고, 어저면 이러한 시각에서 그려졌기 때문에, 수많은 히어로의 출현이 감점이 아닌 이점이 되었으리라. 그 와중에 이 영화가 '타노스와 아이들'이 아닌, '어벤져스'인 이유는, 그 매력 넘치는 빌런 앞에서 매력 뿜뿜하는 마블의 히어로들 덕분일 것이다. 유일한 오점 오역만 아니면 단언컨대 완벽이라는 말 말고는 표현할 말이 없는 영화다. 마블은 마블이다. 한 번도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는. 어벤져스 4가 기대되는 것이 나뿐만이 아님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의 별점 : 4.5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