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발자전거의 공포를 떼는 법
나는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지는 것을 싫어해서 경기할 때마다 제 분을 못 이길 때가 많았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회사 상무님들이랑 실탄 사격과 실내양궁을 할 기회가 생겼는데, 절대 봐 드리는 일 없이 곧 죽어도 이겨 먹곤 했다. 뭐든 잘해야 성에 차는 내가 유일하게 엄두를 못 내는 게 있었는데, 바로 두발자전거였다.
딱 하루, 두발자전거를 신나게 탄 날이 있었다. 몇 학년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초등시절의 어느 날, 올림픽공원 바로 옆에 사시는 조부모님 댁에 갔다가 난생처음으로 두발자전거에 탔다. 나는 겁대가리가 없는 초딩이었기에 올라타자마자 페달을 시원하게 밟아댔다. 만국기가 펄럭이는 평화의 광장을 가로지르고 평화의 문 사이를 종횡무진 누볐다. 게다가 엄마 아빠가 나더러 잘 탄다, 잘 탄다, 하니까 K-모범생은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할머니네 아파트 단지로 돌아온 나는 욕심이 나서 마지막으로 주차장 한 바퀴를 돌고 오겠다고 했다. 중앙 화단을 중심으로 차들이 주차되어있어 그 주위를 원형 트랙처럼 돌기 좋았다. 부모님의 시야에서 벗어나 좌측으로 매끄럽게 코너링하는 순간, 마주 오던 세단이 나를 보고 정지했다. 나는 갑자기 나타난 장애물에 당황하여 속도를 급하게 줄였으나, 멈추지 못하고 비틀비틀 가다가 얌전히 서 있는 차에 콩! 박고 넘어졌다.
나는 벙 쪄서 바닥에 주저앉아있었다. 차에서 내린 아저씨는 내리자마자 자기 범퍼에 긁힌 자국을 확인하고 부모님은 어딨냐며 대뜸 화를 냈다. 돌이켜보면 어린애한테 화부터 낸 그 아저씨가 제일 잘못했지만, 대형사고를 쳤다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고 목이 메었다. 한 바퀴 돌고 온다던 애가 안 오니 부모님이 달려오셨고, 그다음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알고 보니 아저씨는 할머니와 같은 동에 살고 있었고 그로부터 며칠 뒤 한라봉 한 박스를 사서 할머니 댁에 왔다. 애한테 화부터 냈던 게 미안했던 모양이다. 너무나 달콤하지만 꽤나 시큼한 인생 첫 한라봉이었다.
그 뒤로는 아무리 자전거를 타보려 해도 중심이 잡히질 않았다. 자전거에 오르자마자 더는 페달을 밟지 못하고 넘어졌고,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장애물이 눈앞의 것처럼 느껴졌다. 차와 세게 충돌한 것도 아니었는데, 고작 모르는 아저씨한테 혼난 것뿐이었는데, 안 좋은 기억은 자전거와 찰떡같이 연합되어버렸다. 하필 보조 바퀴를 뗀 첫날에 그런 일이 있었던 게 문제였던 것 같다. 재능충인 줄 알았던 자신에게 급격하게 찾아온 실패. 지고는 못 사는 나의 완벽주의적 성향은 그걸 적잖이 큰 충격으로 받아들였던 모양이었다. 나에게 못하는 게 있다는 게 분하고 슬펐고 점점 내 안에 굳어져 갔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2021년 여름, 두발자전거를 타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애인 덕분이었다. 넷플릭스와 배달음식의 연속인 권태로운 데이트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우리는 버킷리스트를 만들었고 그중 하나가 자전거 타기였다. 넌 잘할 거야, 금방 배울 거야. 내가 옆에서 천천히 봐줄게. 애인의 달콤한 말에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조금 놓아보기로 했다. 날이 더워지기 시작한 6월 어느 날, 우리는 올림픽공원에 가기로 했다.
우리는 방이역에서부터 따릉이를 빌려 천천히 걸었다. 우리 옆으로 따릉이를 탄 여유로운 시민들이 지나갔다. 자전거는 생각보다 너무 무거웠고 내가 싫은지 나랑 나란히 걸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걸으면서 페달에 정강이를 몇 번이나 부딪쳤는지 모른다. 이 커다란 쇳덩이를 내가 원하는 속도와 방향으로 조종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커졌다. 불합치, 어긋남, 이런 단어를 떠올리며 우리는 자전거로 5분도 안 걸렸을 거리를 땀을 뻘뻘 흘리며 20분은 걸었다.
핸드볼 경기장 앞 공터에 도착한 애인이 먼저 시범을 보였다. 무섭다고 천천히 가면 오히려 중심이 안 잡힌다고 했다. 처음 세 번 정도는 1미터도 못 가서 악소리와 함께 겨우 땅에 발을 디뎠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얇은 바퀴 두 개로 중심을 잡아보겠다고 올라탔을까, 안 된단 말만 수십 번 했다. 애인은 내 따릉이의 안장을 다시 조절해주고, 자기를 믿고 일단 세게 밟아보라고 했다. 그래, 페달 한 바퀴만... 겁이 많아 말이 많아진 나는 계속 중얼거리며 자전거에 올라탔고 용기를 내 페달을 내리누르며 비명 대신 오마이걸 <Closer>를 불러젖혔다.
페달을 세차게 밟자 자전거는 앞으로 쭉 나갔고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나는 100미터쯤 달린 뒤 브레이크를 잡았다. 20여 년 만의 일이었다.
처음에 직진밖에 못 하던 나는 서서히 완만한 코너를 돌 수 있게 되었고, 멈췄다 섰다를 반복하며 천천히 이동했다. 빠르게 감을 잡아가기 시작했지만 나는 다시 출발할 때마다 여전히 ‘한 걸음 클로서’를 크게 복창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출발을 못 할 것 같았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어느 정도 여유를 찾게 되자, 문득 회사 여자 화장실 세 번째 칸 문에 붙어있던 명언이 생각났다. 너무 뻔하고 맞는 말이라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말. <인생은 자전거와 같다.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한다.> 그 말을 일상에서 떠올리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아주 뼈저리게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움직이지 않으면 자전거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맞는 말이잖아! 우리는 어느새 평화의 광장에 도착했다. 나는 광장을 종횡무진하며 20여 년 만에 트라우마를 극복했다.
따릉이를 주차하고 보니 손이 말이 아니었다. 핸들을 얼마나 꽉 잡았는지 손 전체가 얼얼했고 손바닥은 생고기처럼 새빨갛고 축축했다. 다음날엔 사타구니와 엉덩이가 너무 아파서 움직이기 힘들 정도였다. 평소에 바쁘다는 핑계로 운동을 안 한 업보였다. 신나게 타긴 했지만 몸이 꽤 긴장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신체를 움직인 덕분에 머리가 개운했다.
돌이켜보니 나는 ‘사고 이후로 자전거를 못 타’라는 말에 스스로 함몰되어버렸던 것 같다. 얼마 전에 모 유튜브 방송에서 시청자들의 괴담 이야기를 보는데, 그중 한 시청자가 써놓은 말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어린 시절 충격적인 일을 겪으면 아이가 육하원칙에 맞춰 상황을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 주고, 그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물어봐 주는 게 중요하다고. 나는 그날 그저 두 발 자전거를 처음 탄 날이라 서툴렀을 뿐이고, 내가 잘못해서 아저씨에게 호통을 들은 것이 아니었다.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누가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었더라면 상황을 더 잘 이해하고 충격에서 잘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는 어떻게든 인지부조화 없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제단 해버렸을지도 모른다. 완벽하고 싶어서, 흠이 없고 싶어서, 그 부분은 아예 안 된다고 상정하고 들어가는 방어기제였던 것이 아닐까? 자전거를 못 탔던 게 아니라 나에게 너그럽지 못했던 게 아닐까 싶다. 그것이 두려움으로 발전하고 트라우마니 사고니 자꾸 이름을 붙여버려 안에 꽁꽁 가뒀던 것 같다. 이제 그것을 애인과 오마이걸이 봉인해제 해주었다.
이곳은 안전지대가 아니라 날 가두던 곳일 수도 있다. 두려움이 있더라도 일단 한 걸음 Closer, 진짜 두려워하던 것은 실체가 아닌 두려움 자체였을 수도 있다. 그 한 걸음이 세상에서 제일 어렵지만.
그렇게 나는 자전거를 탈 때 오마이걸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출발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