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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조각조각.

by 남다른 양양

1.

설거지를 하다가 아끼던 컵을 깼다. 올해만 두 번째. 정말 왜 이렇게 정신이 나가있는 것인지 한숨 한번 푹 쉬고 유리를 치운다. 예전에는 뭐 하나 깨지면 기분이 나쁘다고 불안해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그런 게 없다.

'아 깨졌구나.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네.'라는 말이 끝. 그냥 유리를 치우고 다른 컵을 사용하면 될 일이기에 감정의 큰 변화는 없어진 지 오래다. 좋은 건지 나쁜 건 지를 생각하기도 전에 그냥 이런 담담함이 좋은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2.

새로운 회사에 입사한 지 1년. 생각보다 너무 정신없이 지낸 거 같은데 일이 바쁘다 보니 스스로의 소진을 막겠다고 불필요함을 다 잘라냈다. 일이 전부는 아니지만 적어도 집중하고 신경 써야 하는 시기에는 내 무언가가 분산되는 것을 최소한으로 했더랬다. 그랬더니 신기한 건 불필요한 인연이 정리되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또 무엇인가가 남아있다니- 생각보다 섭섭하면서도 시원한 걸 보면 이게 맞는 거 같다는 생각을 한다.


3.

나는 '서로'를 궁금해하고 '존중'하는 사이를 좋아한다. 그래서 일방적인 사람들에게 염증을 느끼곤 했는데 일이 바빠지면서 좋았던 점은 내가 그들의 소리를 들어줄 시간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말을 다 기억할 순 없지만 적어도 저 사람에게 혹은 이 사람에게 중요한 일이거나 알아야 하는 일이면 기억하거나 다시 물어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 주변에 가득했다. 그들은 유독 섭섭해했는데 내가 지쳤으니 방법이 없다. 나도 살아야겠다 싶었다.


4.

애매함이 공존하는 인연이 있다. 어떤 형태의 인연이던 그 애매함이 사람을 지치게 한다. 각자의 이유가 있을 것이고 나 역시도 애매함을 유지하는 관계들을 갖고 있거나 용인하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 이런 관계는 금방 무너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누군가에게 소중해지거나, 소중하게 여겨지고 싶거나'라는 생각이 들 때쯤 그 애매함을 확실하게 느끼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가끔 서글플 때가 있었다. 인연이라면 돌고 돌아도 나에게 올 것이고, 아니라면 놓아야 하기도 한다는 걸 알지만, 다른 걸 떠나 내가 지금 무엇 때문에 애매함을 두고 있는 것인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그건 내 두려움 때문이었다.


5.

오랜만에 꿈을 꿨는데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막연히 따뜻했다는 기억만 있는 것을 보니 엄마가 왔었나 보다 싶었다. 꿈을 잘 꾸지 않는 편이기도 하고 내용이 명확히 기억나는 꿈을 꾼 적도 별로 없지만, 신기하게도 엄마가 나온 꿈은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더라도, 엄마의 얼굴이나 형상이 보이지 않아도 엄마라는 것을 안다.


작년 겨울, 엄마가 돌아가시는 날을 멀리서 보는 꿈을 꾼 적이 있는데 그때 나는 엄마의 얼굴만 보고 있었고, 엄마는 누워만 있었는데 멀리서 보니 무너지고 있는 나를, 엄마를 보자니 서글퍼서 울었던 것 같다. 일어나고 나서도 그 서글픔이 너무 오래 남아서 일어나서 한참, 회사에서 일을 하는 내내 훌쩍거렸던 적이 있다.


그 꿈을 제외하면 엄마가 나오는 꿈은 언제나 따뜻하다. 말이 없어도, 엄마의 형상이 명확히 보이지 않아도 엄마라는 것을 아는 걸 보면 우린 천생연분의 모녀사이가 맞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지금 엄마의 위로가, 엄마가 얼마나 필요한지 알 것 같으니 찾아왔나 싶어서 살짝 미안하기도 했다. 아마 평생 엄마는 하늘에서 나는 여기서 이러겠지 싶어 여전히 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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