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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다른 양양 Oct 19. 2021

절대적인 것.

서른다섯. 이제야 독립합니다.

살면서 나에게 가장 절대적인 것을 뽑으라면 "신앙과 가족"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어릴 적부터 이 두 가지에 대한 부분은 흔들림 없었던 유일한 것들이었고, 내 삶의 가장 큰 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평생 동안 나를 유지했던 이 두 가지 축은 엄마의 죽음으로 인해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삶은 내 평생의 삶이었고 엄청난 믿음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내 삶의 큰 방향이 바뀌거나 힘들 때 기도하면서 묻고, 준비하고, 믿는 사람으로서 기본적인 것, 최소한의 것들을 지키려 노력하며 살아온 삶이었다.


선교학과 사회복지학을 전공했고, 교회에서도 꾸준히 봉사와 신앙생활을 했던 나에게 어느 날 찾아온 엄마와의 이별은 살면서 처음으로 하나님께 "하나님을 떠나겠어요."라고 원망하며 기도하게 된 사건이기도 했다.


처음이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이.




엄마가 어느 날 이유 없이 넘어지기 시작했고, 다리에 힘이 빠져 결국 다리가 부러졌다. 몇 달 깁스를 하고 지내던 그때 큰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낀 나는 새벽예배를 다니기 시작했다.


큰일이 아니길 기도하기 시작했고, 처음 루게릭이 의심된다는 진단을 듣고 나서도 확진이 아니었기에 계속 새벽예배를 다니면서 기도했다. 그렇게 다니길 한 달. 다른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결과를 기다리던 그 시기에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응답을 듣고 난 처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했다.


"엄마를 데리고 갈 거야. 시간이 되었어."


굉장히 명확하고 명료하게 들린 음성이었다. 그 새벽 가슴을 치며 안된다고, 왜 지금이어야 하냐고 울면서 기도했지만 답은 없었고 나는 처음으로 엄마를 데리고 가시면 하나님을 떠나겠다고 말했다. 내가 들은 응답이 잘못들은 것이길. 기도하고 또 기도했지만 거부할 수 없는 너무 명확함이었다.

 

누군가는 희귀병이니 그렇게 응답을 받았다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어볼 수 있겠지만, 그러기에 엄마의 상태는 좋은 편이었고, 확진도 거의 1년이 지나서 받았다.


그리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이 못할 일은 세상에 없다.


내가 궁금한 건 하나님이 엄마를 데리고 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인지가 궁금했다. 그렇다면 내가 거부할 자격 따윈 없으니깐.




시간이 지나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했던 그 새벽에 받았던 응답을 엄마에게 처음으로 말했는데, 엄마가 "응 알고 있었어. 나도 그 응답을 받았거든." 하고 웃었다.


"처음엔 하나님께 두려워서 살려달라고 기도했는데,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내가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이 다 되었냐고 물었는데 시간이 다 되었다고 하셨어. 근데 그 응답을 받고 마음에 큰 평안이 왔어. 체념이 아닌 평안이었어 은영아.


예전에 간 절제술 받을 때 수술실에 들어가서 누웠는데 너를 위해 기도하지 못한 것들이 생각나는 거야. 그래서 한 번만 살려주시면 교회생활 열심히 하고, 은영이 위에서 기도를 쌓겠다고 했는데 그 후로 그렇게 살았어. 한번 살려주셨잖아. 그리고 이제 시간이 다 되었나 봐."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응답은 절대적이다. 나는 엄마의 저 고백을 듣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별을 준비해야만 하는 시기가 왔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던 그날 우리는 웃으면서 울었다.


명확함이었다.

그리고 너무 절대적이었다.




그 후 내가 전한 의사 선생님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오세요.'라는 말이 기도의 응답이라 기쁘다했던 엄마가 생각나 장례를 마치는 날 "하나님. 엄마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다.


엄마의 마지막 기도를 들어주신 건 너무 감사할 일이지만,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가 느낀 건 배신감이었다. 하나님은 알고 계셨다. 내가 가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러니 이 상황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나에게 시간이 필요했고, 신앙도 그중 하나가 되었다.


엄마의 죽음으로 인해 내 절대적인 것 모두가 흔들렸고 세상이 뒤엉키는 느낌이었다.


죽음과 이별에 대한 것만 해결하기도 바쁠 내 감정은 신앙의 추락과 회복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힘든 건 한꺼번에 온다고 누구는 가족의 도움으로, 누구는 신앙의 도움으로 힘든 시기들을 이겨낸다는 데 난 이 모두가 무너졌으니 정말 바닥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럴 때일수록 교회에 나가야지. 신앙을 붙잡아야지." 하고, "엄마가 천국에 갔는데 왜 슬퍼하냐. 믿는 사람이" 이런 말도 하고, "너만 엄마 돌아가신 거 아니잖아. 은영아 교회에 나가야지 너까지 왜 그래."라는 말도 했다. 더 대박인 건 "네가 사역을 했어야 했는데, 그걸 거부해서 엄마가 돌아가신 거야."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다들 미치지 않고서야 왜 저러는지 진절머리가 났다. 나는 목사도, 전도사도 아니고 엄청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왜 나에게 사역자 이상의 것들을 요구하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하나님은 저들이 아는 하나님과는 다른 모양이다.


정말 "너네나 잘하세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신은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 주신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과정들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시험을 겪나 보다 싶다가도, 그냥 겪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나이가 들수록 저 말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고, 3년은 사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절대적인 것들이 모두 무너졌다. 그만큼 내 삶은 폭풍 속을 거닐고 있었고 정말 바닥을 치는 느낌이었다. 신앙의 힘으로 이겨낼 수도 없고, 엄마의 보살핌과 도움으로 이겨낼 수도 없는 그 상황에서 결국 언제나 그랬듯이 나를 살리는 건 나 자신이어야 했다.


아마 하나님도 엄마도 곁에서 떠나지 않고 그 폭풍 속에서 잘 나오길 기다리시겠지만, 두 발을 움직여 걸어 나가야 하는 건 나였기에 죽을 듯이 이겨내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노력 중이다.


그래도 힘들 때나 좋을 때 여전히 하나님을 찾는다. 그래서 친구한테 "난 진짜 어쩔 수 없나 봐."라고 말하고 웃기도 한다.


엄마가 돌아가시면 하나님을 떠나겠다고 했던 내가 여전히 하나님을 찾고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엄마의 마지막 기도를 들어주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도 날 위해서 기도하고 있을 많은 중보자들과, 할머니가 날 위해 쌓았던 기도, 엄마가 날 위해 쌓았던 기도 덕분이다.


앞으로 잘 이겨내고, 신앙적으로도 더 성숙해지고 단단해지길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겪은 이 폭풍의 시간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소망해본다.


Thanks.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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