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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다른 양양 Oct 21. 2021

나 자신만 생각할 수 있는 자유함.

서른다섯. 이제야 독립합니다.

겨울에 진행된 엄마의 장례가 끝나고 처음 맞이한 여름. 퇴사를 하기로 했다. 


그 당시 다니던 직장을 표현하자면 어이없으면서도 힘들었던 곳. 하지만 엄마의 투병기간을 무사히 보내게 해 준 곳이기도 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양가감정을 많이 느끼는 곳이다.


입사를 할 때만 해도 엄마가 다리가 부러져 한동안 가게에 나갈 수 없기에 급하게 알아보고 들어왔던 곳이었지, 희귀병 투병이라는 시간으로 이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당시 나는 7년 넘게 다닌 직장을 퇴사하고 공황장애가 심해져서 1년은 쉬고 싶어 쉬고 있을 시기였는데 갑작스러운 상황으로 인해 원했던 것들을 다 포기한 채 우선 입사를 하기로 한다. 


집에서 가까운 편이었고, 오후 출근이라 오전에 엄마를 보고 나올 수 있는 장점이 있긴 했지만 상사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스트레스가 많았던 곳이다. 일로 부딪히는 건 괜찮지만, 말로 사람을 죽이는 사람과 일을 하는 건 생각보다 별로다. 그나마 함께 했던 직원들이 있었기에 서로 보듬으면서 그 시간들을 잘 버틸 수 있었다. 


여러 가지의 일들과 감정이 섞였던 그곳을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해서 바로 그만두는 건 아닌 것 같아 내가 생각한 기간을 채운 2018년 7월. 퇴사했다.




7월에 퇴사한 나는 8월부터 스타트업이라는 새로운 분야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퇴사와 이직을 하는 과정에서 내가 느낀 건 이상하게도 자유 함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무조건 일을 해야만 했었다. 그 누구도 강요하거나 요구한 건 아니었지만, 우리 상황으로 본다면 그래야만 했다.


엄마는 외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모셨다. 삼촌들은 외국에 계셨고,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 도움이 필요하신 상태였기 때문에 엄마는 일과 간병을 병행하다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두 분을 모셨다. 


처음부터 회사를 그만둔 건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손이 더 필요해지기 시작했고 간병과 일을 병행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너무 힘든 일이었으니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생활비는 삼촌들이 보내주신다 해도 우리 집 생활비에 대한 부분은 우리가 생각했어야 했고, 결국 내가 가장이 되어야만 했던 것도 사실이다.


삼촌들의 자식들도 모두 서울에서 지냈다. 같이 살거나 떨어져 살아도 결국 한국에 있는 유일한 어른이 엄마였다. 우리는 중학교 때부터 거의 같이 지냈고 성인이 되고 각자 독립했지만 10대 후반 5명과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신경 써야 했던 그때. 엄마를 옆에서 지켜보는 나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가족들 안에서는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고 하지만 난 가끔 엄마의 헌신을 가족들이 잘 모르는 것만 같아서 분노를 느낄 때가 있다. 




수고했어 엄마.


부모님을 모시는 과정에서 엄마와 삼촌들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고 있다. 다만, 어른들의 일을 떠나 그 안에서 조금이나마 피해를 본 건 나다. 엄마는 생계를 내려놔야만 했고, 내가 그걸 짊어지게 되었으니. 


물론 삼촌들이 도와줬을지도 모르겠다. 조금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요즘 한 달 간병인 비용만 300이 넘는데 회사를 그만두고 노인 2명을 동시 케어를 한다면 글쎄 조금은 도와줄 수 있는게 아닐까? 


하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나와 엄마의 삶은 우리가 책임졌다. 그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고.


엄마도 힘들었지만, 삼촌도 많이 부담스럽고 힘들었을 시간이었고 그건 부모를 모시는 것에 대한 엄마와 삼촌들의 선택과 결정이었다. 우리 모두 힘들었다. 엄마도 삼촌도 또 그들의 자녀인 우리들도.


우습게도 어릴 적, 사촌들이 나에게 생색을 낸 적은 있었다. 꼭 삼촌들이 나와 엄마를 먹여 살린 것처럼 생각하는 마음. 


어이없게도 만약 우리를 먹여 살렸다면 간병을 하는 와중에도 엄마가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해서 내 맘을 찢어지게 하진 않았을 것이고, 나는 내가 원하는 일들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생색을 내는 건 그들도 나도 아닌 간 절제술을 받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몸이 망가진 엄마였어야 했다. 


또 하나는 당연했던 엄마와의 시간을 포기하고 엄마를 그들과 공유하고 있는 나에게 말할 건 아니었다. 아무리 어렸어도 생각이 있었다면 말이다.


사촌들과 내가 아무리 10대 후반, 혼자 다 할 수 있는 나이라 해도 고민이 있을 때, 일이 생겼을 때 우리가 엄마에게 받은 돌봄과 도움. 사랑과 노력을 무시할 수 없고,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노부모를 모시고 모두 돌아가실 때까지 책임지고 간병을 했다는 걸 가끔 별거 아닌 것처럼, 본인들이 더 힘들었던 듯 말할 때가 있다. 


사람이니 당연히 자기의 힘듬이 더 클 수밖에 없지만, 해 봐야 아는 것도 있다. 특히 간병과 돌봄은 해보지 않으면 그 뼈가 나갈 만큼의 힘듬을 알 수 없다. 절대로.




그래서 그런지 나에겐 강박 같은 게 있었다. 모든지 한 번에 이루어내야만 한다는 강박. 엄마가 너무 힘든 상황이라 생각했으니 내가 빠르게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


대학생 때 누구는 유학이나 대학원이다 생각할 때 나는 빨리 졸업해서 일을 하고 싶었고, 자격증도 한 번에, 취업도 빨리 해서 도움이 되고자 했던 마음이 컸다. 일을 하는 평생 내 용돈을 제외한 모든 월급과 퇴직금은 엄마에게 보내야 했고, 그렇기 때문에 일을 그만둔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랬던 내가 퇴사를 하고 불안정한 '스타트업'에 도전해보게 된 것은, 어쩌면 오직 "나"만 생각해도 되는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자유함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물론 경제적으로 여유로울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10년 넘게 일한 내 월급은 그동안 모두 엄마에게 보내졌고, 투병으로 시작된 병원비는 희귀병 진단을 받으면 좀 경감되긴 하지만, 1년이 지나서 확진을 받았고 병원비는 언제나 상상을 초월한다. 


여유롭지 않은 상황에서도 내가 퇴사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함이라니. 어이없게도 이제야 멋진 어른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앞으로는 그 누구도 먼저 두지 말고 너만 생각해 은영아. 그만해도 괜찮아. 이제."

엄마 남겼던 말이었다. 자신만 생각하라는 말.


그래서 요즘 나 자신만 책임지면 되는 이 독립생활이 생각보다 어색하면서도 새롭다. 누구도 내 손에 쥐어준 적 없는 책임감이었는데, 그게 빠져버리고, 망하던 잘되던 나만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는 이 상황들은 정말 너무 어색하면서도 좋다.


정말. 자유하다.

더 솔직히 말하면 가끔은 철없는 20대가 다시 된 것 같아 좋다. 그런데 나이가 곧 마흔인데 언제 철들고 언제 클지..... 좀 걱정이다 이건.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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