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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다른 양양 Nov 03. 2021

아빠와 나.

서른다섯. 이제야 독립합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글을 쓰고 지우기를 몇 번, 그냥 털어내고자 글을 쓰는 지금. 마음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아빠에 대해 글을 쓰는 건, 건드리지 말아야 할 이야기인 것 같았다. 하지만 털어내야만 내 독립의 과정이 설명이 되는 것 같기도 해서 고민이 많았다. 지금 쓰고 있는 순간에도 이 글을 발행할 수 있을지 감을 잡을 수 조차 없다.


누구는 사생활이고,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이야기라고 말렸지만, 이 이야기가 내 삶의 어떤 약점이 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속 조금이나마 걱정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을 믿고 써보려고 한다.


가족 간의 문제가 없는 집은 없으니까. 




아빠는 유명한 애처가이자 딸바보였다.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아빠는 차가운 성격과 자존심이 강하고, 완벽주의 성향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시대의 남자들처럼 조금은 가부장적인 모습도 있었지만, 나에겐 정말 날 엄청 사랑해주는 아빠. 그리고 엄마를 엄청 사랑한 사람이었다.


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면 저렇게 바라보는구나.' 하고 느낀 게 아빠가 엄마를 바라볼 때의 눈을 보고 알았다. 꿀이 뚝뚝 떨어진다는 의미를 아빠의 눈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아빠가 엄마를 처음 만난 건 회사였다. 아빠는 20대 중후반 지금도 알려진 기업에 이사로 재직 중이었고, 엄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제 막 들어온 신입사원. 8살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의 첫 만남 스토리는 아빠가 매일매일 말해줘서 정말 지겹게도 들었다.


두 분의 공통된 말에 따르면 아빠는 되게 냉철하고 무서운 사람. 사람들이 다 무서워해서 결제를 받으러 가기 어려워할 정도의 카리스마(?)를 발산했다는 아빠를 보고 엄마가  "하나도 안 무서우신 거 같은데 왜 자꾸 인상을 쓰고 계세요?"라고 물어봤다고 했다.


아빠는 결혼에 대한 큰 뜻이 없어서 독신주의자로 살까 했는데, 엄마를 보는 순간 뒤에서 빛이 났다며, 저 말을 하는데 하나도 화도 안 나고 사랑스럽다고 느껴져서 엄청 따라다녔다고 했다.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스토리를 행복하다는 듯 말하던 아빠의 모습은 정말..... 하.....


매일 내 앞에서 "엄마 너무 예쁘지 않니?", "엄마 너무 사랑스럽지?", "무조건 엄마가 먼저야."라는 말을 달고 살았으니 정말... 너무 힘들었다. +ㅁ+;;




앨범 속엔 아빠가 찍은 내 사진이 한가득이다.


엄마에 대한 사랑도 깊었지만, 외동딸인 나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던 아빠는 엄청난 애정을 나에게 퍼붓기도 하고, 많은 것들을 나와 함께 하고 싶어 했다. 


뭐 매일 사랑한다. 말하는 것이나, 끌어안고 뽀뽀하고 이런 건 정말 내가 힘들어서 피해 다닐 정도였고, 퇴근하고 돌아오면 오늘 하루 어땠냐며 매일 물어보는 질문에 대답하기 귀찮아했던 나여서 아빠가 엄청 섭섭해했던 기억이 있다. 


처음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본 것도 아빠와 함께했고, 야구장, 경마장, 놀이공원 등등 항상 모든 곳의 처음은 아빠와 함께였다. 자전거도 아빠에게 배웠고, LP를 만지는 방법도, 사진기와 필름을 만지는 것도 다 아빠에게 배웠다. 


주말에 아빠 발등에 내 발을 포개고 올라가 아빠를 끌어안고 대화를 할 때, 바다에 가서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 갔던 나를 안고 나오고 있는 아빠와 내 사진을 봤을 때, 그 후로 물을 무서워하던 내가 계곡이던 바다에 가서 놀거나 배를 탈 때 무서워하면 언제나 안아주고 손 잡아주던 아빠는 내게 든든함 그 자체였다. 


동물을 싫어하던 아빠가 내 생일에 강아지 집에 큰 빨간 리본을 걸어놓고 나에게 안겨줬을 때 정말 기절할 뻔했다. 그 안에 숨어있던 요크셔테리어 한 마리가 내 첫 강아지였다. 누가 훔쳐가서 끝까지 키우진 못했지만.


크리스마스에는 인터넷도 없던 그 시기에 산타클로스 마을에 국제우편을 보내서 지금도 있다는 '산타클로스 편지'를 직접 받을 수 있게 해주기도 했고, 출장을 가기 전에는 장난감 브로셔를 아예 던져주고는 '갖고 싶은 거 다 체크해봐 은영아.' 하고 내가 접어두면 캐리어 하나를 꽉 채워서 사 오기도 했다. 


그런 나와 아빠를 볼 때마다 엄마가 중간에서 중재해주지 않거나, 나를 방치했다면 정말 버릇없는 공주님이 될 뻔했지만, 나에게 엄마는 무섭고 아빠는 친구 같은 느낌이었다. 아빠는 정말 엄청난 애정을 퍼부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우리가 변하게 된 건 아빠가 퇴사를 하고 사업을 하면서부터다.




아빠의 사업이 힘들어지다가 IMF가 겹치면서 더 힘들어졌다. 여유롭게 살던 우리는 이때부터 어려워졌는데 엄마는 덤덤했는데 오히려 아빠가 그걸 굉장히 힘들어했다. 아마 가장으로써 느끼는, 그리고 자존심이 강하고 완벽주의 성향을 갖고 있던 아빠라면 그 좌절감이 더 컸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내가 알던 아빠는 없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좌절감이 아빠를 힘들게 했다는 걸 내가 사회생활을 해보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난 아빠가 가끔 안쓰럽다. 


그 후로 우리는 그래도 잘 지냈고 동생도 태어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부모님은 이혼을 했다. 이혼의 이유는 아빠의 사업실패도 아니고,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때 당시 부모님의 모습과 부모님이 내게 말해준 이혼의 이유는 둘이 결혼생활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 끝에 내려진 결론이었다.


사실 이혼을 결심하고 나서도 별 문제는 없었다. 부모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던 대로 평온했지만 조정기간이 끝나 엄마가 서류를 제출하면서부터 아빠가 돌변했다. 아빠는 나에게 "진짜 엄마가 이 서류를 제출할 줄 몰랐어."라고 말했고 내가 엄마를 따라가겠다고 말한 것에 큰 상처를 받았다고 말했다.


아빠는 한 번의 위기로 끝나 되돌릴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이 시간의 끝이 확정되자 이성을 잃었다.


그 후부터 아빠는 매일 우리를 찾아와 다시 재결합(?)을 하자는 말이나, 나보고 아빠에게 오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거부했고, 결국 아빠는 나와 엄마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원래 동생과 나 모두 엄마가 키우기로 합의가 된 상황이었는데, 동생을 매일 아빠가 데리고 갔고 엄마가 동생을 데려오려고 하는 등의 실랑이가 벌어졌고 논의 끝에 결국 아빠가 동생을 키우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아빠의 이성이 무너지면서 친가에서는 이상한 말들이 오고 가기 시작한다. 사실 고모들이 우리 집에 얼마나 관심이 많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내가 엄마에게 세뇌되었다는 말이나, 엄마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등. 말도 안 되는 말들을 하기 시작했다. 진짜 스스로가 알 텐데 어이가 없었다.


나는 이혼보다 이 과정에서 아빠에게 실망과 상처를 많이 받았다. 


내가 화가 난 건, 아빠가 이걸 묵인했다는 것이다. 중학교 입학을 앞둔 딸이 엄마에게 간다는 이유만으로 생각 없는 바보가 되어가고 있고,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가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쓰고 있는데 아빠는 본인은 그렇게 이야기한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이걸 묵인했고 비겁하게 회피했다는 것이 내가 아빠에게 배신감과 분노를 느끼는 부분이다.


그리고 고모들은 동생을 갖고 나를 회유하려고 했다. 동생이 보고 싶어 찾아갈 때마다, 아빠가 학교 앞으로 찾아왔을 때 동생을 안고 있던 막내 고모가 동생을 만지고 싶거나 만나고 싶으면 아빠에게 돌아오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남기고 차에서 내려버렸다. 


나는 고모나 아빠가 나에게 그런 짓을 했던 나이가 되면 이해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조카가 생기고 그 나이가 되면서 느꼈던 건 이해가 아니라 분노였다. 


어른들이 일은 어른들이 안다고 해도, 부부간의 일은 고모들이 알 수 없고 참견할 자격도 없다. 우리 가족의 일은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성장한 나보다 더 잘 알 수 없고 그 어린 동생을 가지고 나를 회유하려고 하고 하는 등 내 동생을 도구로 생각하는 모습에 화가 난 나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14살이었던 그때의 나는 엄마 아빠보다 동생을 지켜야 했다. 이런 상황들이 길어지면 동생이 상처를 받게 될 테니까. 나는 이미 보고, 경험했기 때문에 받은 상처는 치유하면 그만이지만, 동생에게 이 모든 과정을 듣게 하거나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빠와의 연락을 끊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아빠를 만났던 날 아빠에게 말했다.


"이제 아빠를 만나지 않을 거야. 아빠는 비겁했고, 이 모든 책임을 엄마에게 덮어씌웠어. 그래서 내가 아빠에게 가장 크게 화를 낼 수 있는 방법이 내가 아빠를 놓는 거더라고. 아빠가 알 거잖아. 이 모든 과정을 설명해준 건 아빠, 엄마였으니까. 


제일 상처 받고 보호받아야 하는 나는 받아들이고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고모들은 왜 행동과 말이 저렇고, 아빠는 왜 지금 말이 다른데? 


동생도 찾지 않을 거야. 내 동생은 내가 커서 찾으면 되고, 이 모든 일에 증인인 내가 하나하나 다 설명해줄 거야. 그러니 나에게 동생을 빌미로 아무것도 하지 마. 눈 하나 깜짝 안 할 거야 이제부터."


아빠는 어떻게 자식이, 누나로써 그럴 수 있냐며, 왜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냐며 나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빠 딸은 바보가 아니야. 아빠가 날 그렇게 키우지 않았잖아? 근데 왜 내가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해? 나는 이제부터 엄마를 지킬 거야. 그리고 아주 똑바로 살 거야. 고모들이 말한 거 내가 아니라고 내 삶으로 증명할 거야. 


엄마도 아빠도 앞으로 나한테 살면서 증명해 누구 말이 맞는지 그럼 내가 판단할 테니까. 그런데 아빠는 우리한테 미안한 마음은 있어? 다시는 찾아오지 마." 하고 나는 차에서 내려버렸다.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내가 끊어야만 아빠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고, 동생도 엄마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가끔 14살의 내가 내린 저 결단과 말들이 가슴 아플 때도 있지만 스스로 멋있었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중학교 1학년이었던 난, 그날 이후로 절대 아빠를 만나거나 동생을 찾아가거나 찾지 않았다. 내가 동생을 찾은 건 동생이 중학생이 되었을 시기에 내가 직접 찾아냈고, 내가 스스로 아빠에게 먼저 연락을 한건 엄마의 장례가 끝나고 나서였다.


그렇게 20년이 조금 지나서야 아빠와 나, 동생 이렇게 셋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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