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를 좋아한다. 피아노마다 건반의 무게와 음색이 각각 다른 것도 좋고 두드리면 언제든지 음이 나는 특질도 좋고 듣고 있으면 어쩐지 위안을 받는 것도 좋고 날 한없이 들뜨게도 하고 음울하게도 한다는 점에서도 좋다. 피아노 곡을 많이 듣는다.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진수영이라는 아티스트를 처음 안 것은 김오키뻐킹매드니스와 새턴발라드를 통해서였다. 부기우기와 홍대 티팩토리에서 공연을 봤는데 건반을 치는 진수영이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스포티파이에 검색을 해보았다. 솔로앨범이 있었다. 최근에 발매된 [Paraphrase]와 2020년에 발매된 [밤, 물 빛]. 일단 [Paraphrase]부터 꺼내 들었다.
음반 소개 페이지 상단에는 단 한 줄이 쓰여 있었다. '모든 기억들과 함께 잠 못 이루는 밤.' 내가 음반을 듣기 시작한 것도 밤 열 시 반이었다. 그 짧은 문장을 보며 첫 곡 '멈춰 선 채'를 듣기 시작했다. 시작부터 마음이 아팠다. 그런 밤들이 있었다. 내게도. 모든 기억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잠 못 이룰 수밖에 없는 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다가도 종종 멈춰 서게 되는 밤. 진수영의 음악은 그런 밤에 어울렸다.
[Paraphrase]의 따뜻한 피아노 소리를 계속 집중해서 들었다. 그의 음악은 나를 예전의 기억으로 데리고 갔다. 내가 일곱 살일 때 그다지 늙지 않았던 엄마아빠처럼 그 당시엔 낡지 않았던 우리 집 업라이트 피아노. 그걸 끝없이 두드리던 나. 클래식 피아노를 연주하는 내 옆에서 언제나 내 음악을 들어주던 엄마. 진수영의 피아노는 그 오래된 추억을 자꾸만 들려오는 것이다. 이런 곡을 어떻게 만들고, 칠 수 있을까. [Paraphrase]를 밤새 하염없이 반복재생하며 나는 잠을 설쳤다.
김오키뻐킹매드니스의 공연을 보며 울었던 한 달 전도 떠올랐다. '코타르 증후군'을 듣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70년대 알앤비 버젼" 이라고 장난스럽게 주문하는 김오키의 말에 진수영은 바로 그것을 구현해냈고 그 오래된 느낌 때문에 '코타르 증후군'이 더 서글프게 들렸다. 그때 처음 생각했던 것 같다. 진수영이 정말 좋은 연주자라고. 티팩토리에서 봤던 새턴발라드 공연에서 진수영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동시에 같이 뱉었던 허밍, 혹은 노래 같은 것들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밤, 물 빛]에 수록된 음악들에도 진수영의 노래가 녹음이 되어 있었다.
진수영의 음악은 외롭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다. 보는 사람을 품는 듯한 색채의 그림을 응시하는 것 같다. [밤, 물 빛]의 '서로 말하지 않아도'는 정말로,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날 아는 것 같다. 그때그때의 내 감정을 알고 그에 맞추어 반응하는 사람 같다. 날 살피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위로가 되고, 들을 때 눈물 짓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하게 된다. 피아노의 그 둥근 색채에 마음이 동한다.
피아노를 좋아한다. 그리고, 진수영의 피아노는 특히 더 좋아한다. 더 덧붙일 말도 없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뉴욕의 MoMA에서 모네의 <수련>을 하염없이 보다가 울어버렸던 날, 그때 보았던 따뜻한 색깔들과 쉽사리 뗄 수 없었던 발걸음을 닮았다. 마치 그날처럼 진수영의 음악 앞에서도 정말 오랫동안 멈춰 서 있을 것 같다. 멈춰 선 채, 그의 피아노 소리를 아주 오랫동안 듣게 될 것 같다. 기꺼이 그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