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ys of Seeing 1장, 3장
이 문화적 가정들은 사실상, 세계의 실상을 명확하게 밝혀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신비화하여 알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과거는, 나중에 새롭게 발견됨으로써 그것이 실제로 어떠했는지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역사는 항상 현재와 과거 사이의 관계를 구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에 대한 두려움은 과거를 신비화하는 데로 나아간다.
현재, 미래가 점점 불투명해지는 불안사회에서 내가 느끼는 두려움과 결핍은 과거로의 회귀로 이어진다. 나는 70-80년대 사회, 특히 서양사회를 동경하고 그리워한다. 현재에 대한 두려움은 나를 신비함으로 무장한 과거로 도망치게 한다.
같은 맥락에서, '미드나잇 인 파리'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은 현대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과거 세계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다. 어느 날, 그는 허밍웨이가 살던 시대로 연결되는 마차를 타게 되고 그곳에서 사랑으로 위장한 불륜을 저지른다. 불륜의 대상인 여성은 그보다 전 시대인 로코코, 바로코 시대를 동경하고 신비화한다. 주인공은 그제서야 인간은 언제나 과거를 신비화하고 그리워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먼 과거로 가자는 여성의 제안을 뿌리치고 현대로 돌아온다.
오늘날의 문화에서 원작의 유일무이한 존재하는 것은 어떻게 평가되고 정의되는가. 원작의 가치는 그것의 희소성에 따라 정의된다. 이러한 가치는 시장에서 매겨지는 가격에 의해 확인되고 평가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예술작품'이기 때문에-예술은 상업보다는 더 위대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시장가격은 정신적인 가치의 반영으로 간주된다. ...... 예술작품은 마치 성물인 것처럼 이야기되고 제시된다. 성물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소실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의 증거이다.
예술작품은 상업보다 위대하고 대단한 것이기 때문에 정신의 영역에 속해야 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정작 예술작품의 가치는 시장가격이라는 지극히 세속적인 영역에 의해 결정된다. 예술은 마치 성물이고 성스러운 것처럼 다뤄지는데, 그러한 이유는 긴 시간 사라지지 않고 남겨졌기 때문이다. 인간이 얼마나 간사하고 피상적인 존재인가. 정신적이고 인간 사고의 영역에서 다뤄지는 것들은 시장가격이라는 간단한 기준으로 정리된다. 내셔널 갤러리에 걸려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성 안나와 성모와 아기 예수와 세례 요한'이 그 예이다.
미술이란 그것이 지닌 유일무이한 변함없는 귄위를 통해 다른 형태의 권위를 정당화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미술은 불평등을 고상한 것으로 보이게 하고, 위계질서를 짜릿한 긴장감을 주는 것으로 만든다.
저자는 3장에서도 설명하지만, 이 대목에서 권위는 권력, 힘, 지위를 이야기 하고 이를 갖고 있는 남성을 말한다. 미술은 고상함과 긴장감이라는 명목으로 불평등과 위계질서를 당연시하며, 남성이 여성을, 여성이 여성 자신을 손쉽게 대상화하게 한다. 자세한 내용은 3장에서 다뤄진다.
과거의 미술을 더 이상 과거에 대한 향수의 감정으로 바라보지 않을 때, 그 작품은 단순히 성스러운 유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비록 복제시대 이전에 그 작품들이 지녔던 본래의 위상을 되찾는 일은 절대로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제는 원작이 전혀 쓸모없는 것이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저자인 존 버거는 원작에 대한 해설 즉, 박물관 안내 책자 또는 안내용 녹음테이프 등이 유일한 방식이 아님을 강조한다. 우리가 작품을 성물 이상의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술을 통해 과거를 향유하거나 지식을 얻으려는 시도를 거둬야 하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복제본을 통해 지겹도록 봐온 다 빈치의 '모나리자' 원작을 보러 루브르 박물관을 찾는 이유는 그것만이 갖는 아우라를 느끼기 위해서일 것이다. 원작은 과거에서부터 살아남았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외감이라든지.
시각예술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보호영역 안에서 존재해 왔다. ...... 이런 역사 내내 예술의 권위는 그 보호영역이 가지는 특정한 권위와 분리되지 못했다.
예술이 고상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유. 인간의 심미감을 자극한다는 것에서도 분명 의미가 있겠지만, 그러한 심미감을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며 어떻게 형성되는 것이지? 결국은 특권층이 자신들의 권위와 세력을 공고화하기 위해 이용한 수단에 불과하다. 돈 많고 권력 있는 누군가의 집무실에 걸린 미술작품은 보호구역 안에서 권위를 유지할 수 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를 치르기 위해 그녀의 자아는 찢겨 두 갈래로 갈라진다. 즉 여자는 거의 계속해서 스스로를 늘 감시하고 감독해야 한다는 말이다. 스스로 갖고 있는 자신의 이미지는 항상 그녀를 뒤따라 다닌다. 방을 가로질러 갈 때, 또는 아버지가 사망하여 울 때도 그녀는 걸어가거나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감시하도록 교육받고 설득당해 왔던 것이다.
사실 이 대목은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뿐사뿐 방을 가로질러 가는 나의 모습. 누군가가 사망하여 서글피 우는, 울다가 눈이 붓고 얼빠진 나의 모습(실제로 그렇지는 않더라도). 문장을 읽으면서 당연히 나를 대입하고 상상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존 버거에 의하면 이렇게 나의 모습을 그리는 행위는 나를 타자화하고 대상화한 결과이다. 결국, 쉽게 대상화에 노출되지 않는 남성들은 이 대목을 읽으며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가 너무나도 쉽게 대상화될 수 있기 때문에 위의 문장을 읽으며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 남성이 있다면 '당신은 진정한 남성이 아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당신도 그저 스스로를 대상화하는 것에 익숙해진 것 뿐이다. 내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 온 것이 나를 대상화하면서 만들어진 사고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자 소름이 끼쳤다.
이러한 이야기를 단순화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들은 행동하고 여자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남자는 여자를 본다. 여자는 남자가 보는 그녀 자신을 관찰한다. 대부분의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의 관계는 이런 식으로 결정된다. 여자 자신 속의 감시자는 남성이다. 그리고 감시당하는 것은 여성이다. 그리하여 여자는 그녀 자신을 대상으로 바꿔 놓는다. 특히 시선의 대상으로.
여성은, 나는 두 가지의 자아를 갖고 살아간다. 감시하는 나, 감시 당하는 나. 여성의 사고의 디폴트는 남성 중심적 사고이다. 자신이 남성 중심의 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않는 한, 여성은 언제나 자신을 대상으로 대한다. 누군가의 소개팅 자리가 만들어지는 일반적인 과정을 생각해보자. 여성에게는 남성의 직업(능력)과 재산(돈)에 대해 이야기 하고, 남성에게는 여성의 외모(몸매)와 얼마나 싹싹한지 애교가 많은지에 대해 이야기 하며 주선 자리를 마련한다. 남성은 그가 소유한 외부의 어떠한 것으로 이야기 되지만, 여성은 그가 그 자체로 갖고 있는 어떠한 특성으로 이야기 된다. 여성은 언제나 자신의 돌아봐야 하고, 갖춰야 하고, 감시하고 관리해야 한다. 여성은 자신을 마치 외부에 존재하는 것처럼 시선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결말은 남성이 행동하고 여성이 보여주는 것에만 몰두했기 때문이 아니냐고? 여성이 보여주는 것에 몰두하는 이유는 그가 자신을 감시하도록 교육되고 설득당했기 때문이다. 여성이 남성과 똑같은 말을 듣고 똑같은 대우는 받으며 똑같은 평가를 받고 자랐다면 지금과 같이 '보여주는 존재'로 내면화 되었을지 싶다.
화가가 벌거벗은 여성을 그린 이유는 벌거벗은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의 손에 거울을 쥐어 주고 그림 제목을 허영이라고 붙임으로써, 사실상 자신의 즐거움 때문에 벌거벗은 여자를 그려 놓고는 이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여성이 대상화 되는 원인을 여성에게 책임 전가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어떠한 사건이 발생하는 이유는 그로부터 이득을 얻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누드화를 그려서, 사서, 전시해서 이득을 얻는 사람은 여자일까 남자일까? 만약 누드화에서 이득을 얻는 사람이 여자였다면 여성이 누드화에서 이렇게나 많이, 구경거리처럼 그려졌을까? 누드화를 보는 사람, 누드화로부터 이득을 얻는 사람은 철저히 남성이었다(이다). 당시 누드화를 그리는 사람은 남자, 그것을 집에 걸기 위해 사거나 주문한 사람도 남자, 누군가의 집에 놀러가서 감상하는 사람도 남자. 3차 관객까지 철저하게 남성을 위해 그려진 것이다.
이 그림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럽의 전통에서 일반적으로 여인의 몸에 음모를 그려 넣지 않는 관습 역시 동일한 목적에서이다. 음모는 성적 능력 및 욕망과 관련이 있다. 여인의 성적 욕망은 최소화되어야만 한다. 그럼으로써 그림을 보는 남자는 성적 욕망이 남자만의 전유물이라고 느낄 수 있게 된다.
현대에서도 적용되는 대목이다. 과거나 현재나 여성의 권리는 절대 주체를 찾지 못했다.
유럽의 누드 예술형식에서 화가와 관객(소유자)은 보통 남자이며 대상으로 취급받는 인물은 보통 여자다. 이런 불평등한 관계는 우리 문화에 아주 깊이 각인되어 있어 지금까지도 많은 여자들의 의식을 형성한다.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을 여자들 스스로도 자신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도 남자들이 여자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자신들의 여성성을 살펴본다.
여성이 남성의 눈으로 자신을 인식한다는 위의 대목과 같은 이야기이다. 여성이 자기연민에 빠지지 말아야 할 이유, 작은 것에 대한 반성의 존재가 되지 말아야 할 이유, 사회를 탓해야 하는 이유이다. 사회에 완벽히 적응한 여성일수록 자신을 대상화하는 것에 익숙해져있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까지 읽었는데도 일개 여성의 의견일 뿐이고 내가 세상을 삐뚤어지게 쳐다보는 것 같이 느껴진다면, 남성이고 미술비평의 개척자이자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인 존 버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 책에서 전통적인 누드화를 아무 작품이나 하나 고른 다음, 그림 속 여자를 남자로 바꾸어 보자. 머릿속에서 생각만 해도 좋고 직접 그려 봐도 좋다. 그리고 그런 전환이 얼마나 폭력적인 것인지를 살펴보기 바란다. 이미지 자체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관객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 관념에 대한 폭력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