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때 많은 또래 친구들을 요리사의 길로 이끈 드라마들이 있었다. 바로 '파스타'와 '제빵왕 김탁구'이다. 두 드라마를 통해 '셰프'라는 직업과 양식조리, 제과제빵 등이 유명해졌다. 그렇게 요리를 시작한 사람들 중 지금도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미디어의 힘은 정말로 대단하다. 나 역시 영화 '금발이 너무해'를 보고 하버드 로스쿨을 꿈꿀 정도로 미디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학생 중 1명이었으나 내가 요리사를 꿈꾸게 된 계기는 좀 더 사소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는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다. 요리에 큰 관심이 없는 엄마, 한 달에 한번 요리를 할까 말까 한 아빠, 요리에는 재능이 없는 언니 밑에서 용케도 요리를 좋아했다. 나의 소소한 요리들: 계란말이, 크림 스파게티, 떡볶이 등을 맛있게 먹는 사람들을 보며 기뻤고, 사람들의 칭찬은 내가 요리사를 꿈꾸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한국에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특성화 고등학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자연스레 요리사를 나의 꿈으로 삼았고, 조리고등학교 입학을 목표로 중학교 시절을 보냈다.
중학교 때 열심히 내신을 관리해 조리고등학교를 가고, 졸업 후 요리사가 되는 것, 그것은 그 시절의 나에겐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처럼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입시 원서를 써야 할 시기가 왔을 때 예상치 못한 부모님의 반대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의 다짐이 설마 지금까지 그대로겠어'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미리 반대하면 공부를 열심히 안 할 것 같다는 걱정이었는지 부모님의 반대는 원서를 써야 할 그때 불쑥 나타나 내 길을 가로막았다.
반대해도 어쩌겠는가. 그때의 나는 반드시 요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고로 누군가를 설득할 때는 PPT만 한 게 없지 않은가. 그래서 몰래 PPT를 만들어 부모님 앞에서 발표했다. 내 인생 첫 Presentation이었다. 온라인 표현 자유화를 위해 쓰이는 블루리본 그림을 (지금 생각하면 의미가 안 맞는데 왜 넣었는지 모르겠다) 첫 번째 제목 슬라이드에 넣었고, 왜 요리를 하고 싶은지, 왜 조리고를 가야 하는지, 입학 후 어떻게 학창 시절을 보낼 건지, 졸업 후 계획까지 구체적으로 작성해 발표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생각해볼게'였다.
사실 나는 발표를 한 그날 허락을 받을 거라 생각했고, 그래야만 했다. 왜냐하면 바로 며칠 뒤가 원서 제출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제출일까지 허락을 받지 못한 나는 '깜박하고 엄마 도장을 두고 왔다'는 거짓말로 점심시간 외출을 허락받아 집에서 몰래 도장을 훔쳐왔다. 지금도 그때의 내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뛰어가는 내내 외출증을 손에 꼭 쥐고 있었고 검은색 삼선 슬리퍼를 신고 뛰며 '슬리퍼 신고 참 잘 뛴다'라는 생각을 했다. 집에 도착한 후, 먼지 쌓인 옷장 위에서 도장을 발견하고는 안도하며 서둘러 학교로 돌아갔었다. 그렇게 원서를 선제출?하고 얼마 후, 나는 드디어 부모님께 허락을 받아 원하던 고등학교에 당당히 입학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