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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 전세사기 | 글을 쓰기 싫다.

자기 만족과 타인의 시선이 부딪히는 일. 결국 나와 내가 싸우는 일.

by 예지

이번 편은 연재 스토리와 상관없는 작가의 푸념이 담긴 글입니다. 자유롭게 읽어주세요 :)




최근 글을 쓰기 싫다는 생각이 여러번 들었다.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 내가 이 글을 왜 기록하기로 했는지 곰곰히 생각했다.​





“전세사기를 왜 글로 쓰기 시작했더라..”

1. 미래의 나에게 읽을거리 제공하기

수많은 터닝 포인트 중 인생의 전반기에 닥친 가장 큰 사건이라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싶을 때 찾아볼 수 있게끔 하고 싶었다.

2. 나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용기 되기

전세사기 피해자들과 오픈채팅에서 대화를 했던 적이 있는데, 많은 분들의 분노와 절망이 폰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졌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다. '전세사기'를 나보다 더 긍정적인 마인드로 극복하신 분들도 계실테지만, 보탤 수 있다면 나의 극복 과정을 통해 용기와 희망을 조금이라도 드리고 싶었다.

3. 글감을 찾던 내게,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글감

10년 전, 처음 여행을 시작하며 썼던 몇 몇의 글이 반응이 좋았고, 그제야 내가 글을 쓰는 시간을 참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다. 되려 그 이후로 좋은 글을 써야한다는 강박 때문에 '좋은 글감이 생길 때를 기다린다'는 핑계로 글 쓰는 것을 멀리 했는데, 드디어 피할 수 없는 '좋은' 글감이 제 발로 찾아온 것이다...

4. 디지털 노마드가 되고 싶어

내가 담기고 싶은 회사를 찾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보편적인' 회사는 EGO가 강한 나와 맞지 않았고, 그럼에도 '기술'이 없던 나는 꾸역 꾸역 회사를 다니며 '내 콘텐츠'를 만드는 디지털 노마드를 10년 가까이 꿈꿨다. 그러다 지금 나이가 된 것이다. 안돼. 뭐라도 해야지. 나는 뭘 잘하지? 글을 써볼까? 뭘 쓰지? 전세사기 피해자가 만든 콘텐츠는 아직 얼마 없지 않나? 그래 가자.



몇 개월 전 이런 네가지의 큼지막한 이유로 나는 글을 쓰기 시작 했다. 게으른 완벽주의자인 나는 뭐 하나를 시작하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려운데, 일단 과거의 나와 비교해서는 글을 쓰는 행위를, 그것도 '연재'라는 약속으로 시작한 것이 꽤 큰 발전이었다.

위의 동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튼 글을 쓰고, 글을 읽는 ‘나’를 위한 것이었는데, 어느 시점 부터인가 쓰는 행위가 재미 없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더 큰 문제는 내 글을 읽는 행위 조차 재미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글 하나를 완성하면 그걸 몇번은 곱씹어 읽으면서 내 필력에 감탄하기도, 부끄러워 수정하기도 하는 과정이 늘 있어왔는데 그게 없어졌다.

아마 4화 쯤이었나.

전세사기를 겪고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변화했다는 이야기를 다뤘던 편.

그 편에 내가 글로 담고 싶었던 모든 마음이 담겨있어 그런지, 그 이후의 글쓰기가 마치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 순서가 지난 뒤 시청하는 음악방송처럼 느껴졌다.

(물론 신나서 재밌게 쓴 편도 있었다)

이런 내가 이해가 가지 않아 챗 gpt에게 질문했다.

“내가 좋아하는 걸 찾는건 어떻게 하는거야?”

여러번의 질문이 오간 뒤, 내가 ‘사건과 사실’ 중심의 글을 쓰는 일에는 딱히 흥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배고픔도 느끼지 못한 채 눈을 반짝이며 쓰는 글은 ‘나의 성장과 감정’에 국한 된다는 것도.

사건은 부싯돌 같은 거였다.

내 감정이 타오를 수 있게 하는 시발점.

그리고 그것의 역할은 거기까지 였다.

나는 지금까지 타오르는 불에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그 부싯돌에 얽매여 이번 글을 대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왜 그랬을까.

내 공간이라고 해놓고,

내 도전이라고 해놓고,

내 실험이라고 해놓고.

‘독자들은 사건이 어떻게 흘러가는지가 궁금할거야’

매일 텅빈 화면을 바라보고 키보드에 손을 올릴 때 마다 떠오른 생각이었다.

타인에게 주도권을 내어주고 말았다.

못난 습관이 또.

발목을 잡아온 습관이 결국.

사실

타인의 기대에 맞춰가는 일은 재미가 없다.

재미가 없는데 꾸역꾸역 하려니 힘들지.

재미있는 사실은 그 누구도 나에게 사건 위주로 쓰라고 한 적도, 감정을 쓰지 말라고 한 적도 없다는 것이다.

그냥, 내 안의 무언가가, 아늑한 무의식 속 어떤 것들이 자꾸 나를 속박하고 있다.

언제 만들어진 무의식일까.

떠오르면 또 지켜볼 일이다.



연재하는 수필의 내용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겠지만, 나는 이 연재 과정에서 또 한번 인생을 배우고 나와 마주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좋고 싫은 것을 파악하는 법,

그리고 어째서 그걸 좋아하고 어째서 그걸 싫어하는지 같은 것들을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연습.

이런 시행착오들이 참 재미있다.

이제야 나와 친해지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혹여나 누군가 나의 태도에 실망을 한다고 해도,

I dont care.

그 이상의 것을 얻었기에

이번 도전은 충분히 잘한 도전이다.

의미가 있다.


혹여나 이 글을 여기까지 읽어주셨다면 매우 감사합니다.

쓸데 없는 얘기지만 꼭 쓰고 싶었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제 공간에 글을 쓰는 일이 왜이리 어려운가 싶어 꽤 오랜시간을 고민하고 써보았습니다.

연재에 대한 고민과는 별개로 ‘해피 엔딩’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주에는 형사재판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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