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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전세사기 | “사라진 임대인 찾고 계시죠?” 2편

사라진 임대인을 찾아주겠다는 익명의 제보자가 나타났다.

by 예지

ㅇㅇ경찰서 수사관입니다.

익명남과 대화를 마친 후, 얼마 안 가 한 통의 전화가 또 걸려왔다.

상황을 지켜보자며 한 발 물러서 있던 세입자였다.


"예지씨, 제가 그 남자 경찰한테 얘기했어요. 제 사건 담당 수사관님한테요."


무탈히 익명남과 대화를 끝냈다는 안도감에 젖은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불안이 파고들었다.


'먼저 신고하시고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무서워 죽겠는데..'

속으로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잘하셨다며 나머지는 경찰과 얘기하겠다고 했다.


"그 사람이랑 연락한 건 예지씨니까 경찰이 예지 씨한테 연락할 거예요.

연락받고 놀라실까 봐 알려드리려고 전화했어요."


당연히 수사에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말할 마음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얻는 것과 감수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 떠올렸다.


당시 나는 임대인을 고소하지 않은 상태였다.

고소장을 준비 중이었지만, 완성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혹여나 경찰에게 얘기를 전하면,

그가 나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도 경찰이라니 제보자 정보를 보호해 주리라 믿고,

모든 얘기를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문자가 왔다.

ㅇㅇ 경찰서 ㅇㅇㅇ 수사관입니다.
통화 가능하신 시간에 연락 부탁드립니다.


식사를 빠르게 마치고 짬을 내 전화를 걸었다.


나는 익명남과의 대화 내용을 사실대로 전했고,

수사관은 그 남성이 전세사기 피해 건물과 관련이 있는 사람인지에

초점을 맞춰 대화를 듣는 듯했다.


통화를 마치기 전,

그 남성의 보복이 두렵다는 얘기를 빼놓지 않고 전했다.

수사관은 그런 부분은 걱정하지 않도록 주의하겠다고 했다.


더불어 나도 형사 고소를 준비 중인데

지금 소장을 접수하는 게 유의미하겠냐고 물었다.


수사관은 수사가 더 진행되고 나서

범죄 가능성이 확실해졌을 때 연락을 드릴 테니

그때 접수를 하라고 했다.


아, 이상한 사람이랑 엮여서 괜히 스트레스만 받고

정작 나는 임대인을 고소도 못하는 상황이구나.


숨이 절로 길게 뱉어졌다.


경찰서 수사관님의 문자


피하고 싶었던 순간, 결국 오는구나

경찰과 통화가 끝나고 10분쯤 지났을까.

익명남에게서 메세지가 왔다.


"왜 저를 신고하셨나요?"


심장이 철렁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지만 내가 '신고'를 하진 않았기에

무슨 소리인지 모른다 대답했다.


본인의 메신저 계정이 신고를 당했다는 이야기였다.


'계정 신고요? 저는 그게 뭔지도 몰라요.'


진짜 몰랐다.


알고 보니 익명남은 며칠 전

다른 세입자에게 먼저 연락을 했었고,

그 당시 다른 분께서 계정 신고를 했던 것이

기막힌 타이밍에 맞물린 것이었다.


잡아떼길 잘했다.

그건 정말 모르는 일이니까.


한 동안 제 혼자 울리던 알림이 잠잠해졌나 싶었을 쯤,

다시 익명남에게서 한 통의 메세지가 도착했다.


"경찰에 제 얘기를 하셨나요?"


경찰의 연락을 받았다며

왜 본인 얘기를 했는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하 씨..

어떻게 경찰과 통화한 지 한 시간도 안 돼서

이런 연락을 받을 수 있지?


저는 정말 모르는 일이에요.
그리고 저는 님께서 저를 도와주신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왜 경찰에 신고를 했겠어요.


하지만 그는 나를 끝없이 몰아붙였다.

경찰서가 아닌 것을 증명해라,

근무지에서 시계가 보이게 사진을 찍어 보내라,

거짓말인지 두고 보겠다는 협박까지 했다.


이럴까 봐 조용히 넘어가고 싶었는데.

결국 모든 위험은 내가 떠안았다.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


알아서 하시라는 말을 끝으로

대화를 끝냈다.


그리고 수사관에게 연락해 무서워 죽겠다고

분명히 제가 조심해 달라고 하지 않았느냐 따졌다.

수사관은 미처 신경 쓰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 뿐이었다.


그래요.

저도 이제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아요.



그는 나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날 밤

집착은 다시 시작 됐다.


'거짓말하셨네요?'

라는 메세지를 시작으로

지방 단독주택 주소가 줄줄이 쏟아졌다.


1개, 2개, 3개… 10분 동안 폭포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진동 소리에 내 몸도 함께 떨렸다.


머리가 멍해져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소파에 앉아 핸드폰이 멈출 때까지 바라만 봤다.


이렇게 아무 주소나 보내면 그만인데,
제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제 말을 믿었나요?


답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대답할수록 그 남자의 집착에 기름을 붓는 것 같아 말을 삼켰다.


차분히 메세지 한 통을 남겼다.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저를 도와주시려고 했던 분으로 기억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앞으로는 답장하지 않겠습니다.


그도 더 이상 자기 얘기를 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대화를 끝냈다.




나는 지금까지도 이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다.

어쩌면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쁜 마음만 먹으면 내가 이사 온 집도 금방 찾지 않을까?

내 얼굴도 이미 알고 있지 않을까?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 적막뿐인 집이었다.

상상 속에서 나는 이미 끔찍한 일을 몇 번이고 당했다.


몸을 움직여 떠오른 장면을 애써 지워도,

상상은 다시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보복. 해코지.

그 단어들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해가 지고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거나

운동을 갈 때도 심호흡을 하고 나가야 했다.


매일 다닌 길을 뒤로하고

다른 길로 돌아 집으로 오는 날도 있었다.


두려움에 떨며 견딘 날들,

다행히 현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지나갔다.

상상의 사슬에서 나는 조금씩 자유로워졌다.



그 전화 이후, 평범하고 조용한 일상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지 말자.
차라리 아무 일도 없는 게 낫다.
가만히 있자.


하지만 세상은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날도 나갈 채비를 하던 중이었다.


잊고 있던 수사관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번 편은 정보 노출의 위험이 있어 구체적인 묘사가 없거나 다르게 표현된 부분이 있습니다.


다음 편에 '형사 고소' 에피소드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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