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고소장
안녕하세요, 지난번 통화했던
ㅇㅇ경찰서 ㅇㅇㅇ수사관 입니다.
네, 무슨 일이신가요?
전에 임대인 형사 고소 하신다고 하셨었죠?
최대한 빨리 준비하셔서 접수하셔야 돼요.
늦어도 이번주 안으로요.
접수하시면 진술을 위해 경찰서 한번 방문해주셔야 하고요.
어찌된 영문인지 물을 겨를도 없이 알겠다고 했다.
수요일쯤 받은 전화였다.
처음에는 혼자 소장을 준비하다 시간이 생겨
지인 법무사분께 부탁을 드려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주 안에 완성되긴 어렵다는 걸 알게돼,
결국 다시 혼자 쓰기 시작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가장 기본이 되는 육하원칙을 떠올렸다.
이미 변호사들의 의견도 나뉜 만큼
임대인의 사기를 글로 증명하는 것.
그게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
계약서를 수백 번 들여다봤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남아있지 않았다.
계약 당시 녹음을 한 것도 아니었고,
혹시 몰라 부동산을 몇 번씩 찾아가 들은
설명을 메모한 종이조차 없었다.
증거를 중심으로 서술하자니,
나조차도 의심스러워졌다.
‘이게 과연 남들이 봤을 때도 사기일까?’
그러다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어나갔다.
쓸수록 글은 길어졌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 고소장이었지만,
어디 공모전에 출품하는 것도 아니고
일단 제출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뒤늦게 내가 제출한 고소장을 본
어머니의 지인인 법조인 분들께서는
'고소장 그렇게 쓰는거 아닌데..'라는
말을 남기셨다고 한다.
'그럼 빨리 좀 알려주지 그러셨어요.'
그런데,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굳이 그 말을 내게 전하는 엄마가 더 미웠다.
엄마와 첫째 딸, 그 복잡한 관계
돈이 없으니 변호사를 쓸 수는 없었다.
한 푼이 아쉬운 상황이라
미래에 받을 돈도 미리 아껴야 했다.
그래서 모든 걸 혼자 준비했다.
나는 원래 뭔가를 선택하기 전,
집요하게 파고드는 습관이 있다.
핸드폰을 바꿀 때도 2주 내내 핸드폰만 파헤친다.
출시된 모든 기종과 지난 시즌 모델의 차이를 알아야
그제야 겨우 결정할 결심을 한다.
틀리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이다.
정답이 없는 문제인데도,
자꾸 뭘 그렇게 틀리기가 싫다.
이 사건을 혼자 준비하고 대응하면서
엄마에게 수없이 들었던 말은
"거기선 이렇게 말했어야지"라거나
"그러게 엄마 말 들으랬지"였다.
그리고 뒤에는 항상 '내가 너를 잘못 키워 그런가보다'라는 말이 따라왔다.
잔소리로 여기면 그만 일 '틀렸다'라는 말이
이 나이까지도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서류 한 장도 허투루 쓰는 법이 없는데,
밤새 들인 내 노력이 '틀린 것'으로 치부되는 일.
나는 그게 전세사기를 당한 현실보다 괴로웠다.
엄마와 전화를 하고 싶지가 않았다.
무슨 말을 들을 지 뻔했으니까.
그러면서도 사건이 바뀌면 가장 먼저 엄마를 찾았다.
모순적인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엄마의 말은 늘 ‘걱정과 사랑’이라는
포장지를 두르고 있었지만,
정작 그 안에 담긴 것은
'딸에 대한 부족한 믿음'이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후일담을 전하자면,
이 일을 계기로 한참 뒤 엄마와 깊은 대화를 나눴다.
끝내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장문의 편지를 받았지만,
속이 시원하진 않았다.
어쩌면 나는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역시 내 딸 장하다"라는
칭찬이 듣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쎄하다'는 감정은 과거의 내가 쌓아온 빅데이터다.
고소장을 접수한 다음 날,
진술을 위해 경찰서를 찾았다.
통화를 했던 수사관이 담당자였다.
조사실로 들어서며 긴장감이 몰려왔다.
알고 있는 내용을 전부 진술했고,
수사관은 진술 중간 중간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약 당시 상황과 동행인에 대해 물었다.
알고 보니 내가 고소장을 접수한 마지막 세입자였고,
여러 명의 진술이 모여
임대인의 거짓말들이 드러났다.
보증금 허위 고지,
전 세입자 정보,
집 구매 경위까지.
자잘하고 하찮은 대화들도 거짓이었다.
그제야 느꼈다.
계약 당시의 ‘쎄함’은 그냥 기분 탓이 아니었다는 걸.
진짜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네
경찰 조사까지 마치자 큰 숙제를 끝낸 기분이었다.
형사든 민사든 사건 접수부터 종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하니,
민사도 바로 진행하기로 했다.
법무사분께서 작성해주신 소장은
오탈자와 옛날 개념 탓에 보정 명령을 받았다.
'이제 민사도 혼자 헤쳐나가자.'
그리고 그 과정에서
피고가 회생이나 파산을 하는 케이스를 알게 됐다.
민사에서 승소하더라도
피고가 회생이나 파산을 신청하면
내 채권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
그걸 막는 한가지 방법은
내 채권이 '범죄'에 의한 채권이어야 했다.
청구 원인을 한번 더 수정할 가능성도 고려해 소송을 준비했다.
문제는 송달이었다.
피고의 주소지가 불명이라
주소 보정 명령이 떨어졌다.
이미 임대인의 텅 빈 초본을 떼 본 적이 있기에
법원에서 보내온 서류를 들고
형식상 주민센터를 찾았다.
이전과는 다르게 과거 주소지가 모두 적혀있는
두툼한 초본을 받아들었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주소지가 떡하니 적혀있었다.
전입 날짜를 보니.. 바로 오늘.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집 주소를 알게 된 것은 다행이었지만,
송달까지 시간이 더 지연 될 판이었다.
민사는 채무자들 사이의 시간 싸움이라
하루라도 빨리 승소해야 재산을 확보할 수 있는데,
나보다 먼저 소송을 진행한
세입자, 카드사, 은행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불안해졌다.
나는 가장 비싼 송달료를 지불하고
주소 보정을 신청했다.
제발 빨리 송달되길 빌면서도,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이라며 불안을 다독였다.
매일 전자소송 사이트에 접속해 송달 여부를 확인했다.
특별송달을 신청했지만, 오히려 처리가 늦어졌다.
법원에 전화를 걸자,
사건이 많아 담당자 배정이 늦어진다고 했다.
'젠장. 또 다른 장애물의 등장이군.'
헉. 대박. 이 말 밖에는.
그날 밤, 10시가 넘은 시각.
진동과 함께 수사관님의 이름이 떴다.
'이 밤에 무슨 일이지?'
수사관님은 간단한 인사를 시작으로
수사 결과 통지서를 보내야해서
집 주소 확인차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그리고 주소 확인이 끝난 후 이어진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나는 초등학생처럼 “헉”, “대박”만 내뱉었다.
연신 감사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내가 경찰서에 출석해 조사를 받을 때도
이미 혐의가 거의 확정 된 상황이었고,
마무리 단계에서 다른 세입자들의 증언을 확보한 것이라고 했다.
적어도 몇 개월은 걸릴 줄 알았는데
불과 한 달 만에 임대인의 구속 소식이라니.
나는 그동안 터널인지, 동굴인지도
모르는 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출구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던 길.
그런데 멀리 빛이 보였다.
이 길은 결국 끝이 있는 터널이었다.
글이 다소 길어져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