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걸려온 익명의 전화.
이번 편은 정보 노출의 위험이 있어 구체적인 묘사가 없거나 다르게 표현된 부분이 있습니다.
평화로운 일상을 깨부순 연락
외출 준비를 하던 참이었다.
준비를 할 때는 좋아하는 노래를 켜놓고
핸드폰은 들여다보지 않는 습관이 있어,
그날도 평소처럼 화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진동 소리가 갑자기 들려 핸드폰을 보니
모르는 계정에서 메세지가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익명의 계정이었다.
프로필 사진은 메신저 전용 캐릭터였다.
(이하 '익명남'으로 표기)
누구시냐 묻고는
그동안 읽지 않았던 메세지를 확인했다.
이전 집의 관리인이
나를 단체방에 초대한 흔적이 있었다.
관리인은 분명 단순 건물 관리만 했다고 들었는데..
익명남은 누구시냐는 내 물음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전에 내가 살던 집의 주소를 대며
이곳에 살던 사람이 맞는지
이사는 했는지 집주인은 찾았는지 캐물었다.
그는 누구인지 알려달라는 내 말은 무시한 채
본인 말만 이어나갔다.
본인도 당한 게 있는 억울한 사람이라며,
전화를 걸 테니 녹음 없이 전화를 받으라고 했다.
알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젠장,
사과폰이라 진짜 통화 녹음이 되지 않았다.
황급히 유료 어플을 검색해 다운 받던 중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 표시 제한'
고등학생 시절, 전남친에게 받은 후로
본 기억도 없는 문구였다.
"ㅇㅇ씨 맞으시죠?"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네 그런데 저를 어떻게 아셨어요?'"
"그건 묻지 마시고요.
저는 임대인 거처를 알고 있어서
도와드리려고 전화드린 거예요.
제가 전화를 했다는 사실이나
이런 정보를 들었다는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시면
저는 바로 연락 끊고 정보도 안 드릴 겁니다."
이 전화가 이상하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거주지 불명 상태인 임대인을
합법적으로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어디에도 없어,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들어나 보기로 했다.
"지금 임대인 어디 있는지 아세요?"
"서울에서 집 경매 넘기고 지방 내려갔다던데.
임대인 사는 집이 지금 매물로 나왔어요.
듣기로는 집에 뭘 숨겨놨대요 돈 될 만한 걸.
부동산에 연락해서 집 보러 온 사람인 척하고 들어가 보세요.
그때 세입자라 얘기하시고
못 받은 돈 찾아서 나오시면 됩니다.
가시는 날짜랑 시간은 제가 정해드릴 거고
주소도 그때 알려드릴게요.
다른 세입자 분들이랑 상황을 공유하시고요.
다시 연락드릴게요."
범죄 영화에서나 볼 법한 대화였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주거침입 같은데... 설령 아니어도, 그 사람이 돈을 순순히 내줄까? 혹시 함정은 아닐까?’
나는 바로 다른 세입자들에게 연락했다.
한 분은 당장 내려가 보자고 했고,
다른 분은 상황을 지켜보자고 했다.
나머지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어차피 임대인은 못 찾을 사람이었는데, 일단 믿어보자.’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지만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밤, 역시나 잠을 이루지 못했다.
10분에 한 번씩 핸드폰을 확인하며
그의 다음 연락만 기다렸다.
새 집에서도 뜬 눈으로 밤을 새우는 날이 생겼다.
다음 날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못 버티고 내가 먼저 메세지를 보냈다.
오늘이라도 찾아가고 싶은데, 주소 알려주실 수 있나요?
곧 다시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전화가 왔다.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제가 정해드리는 날에 가세요.
주소는 그때 알려드리겠습니다.
다른 세입자분들과도 꼭 함께 하세요."
주소를 먼저 줄 수는 없겠냐는 나의 물음에 그는
"그럼 제가 가진 정보를 다 드리는 건데, 그건 좀 그렇죠"
라고 대답했다.
그럼 그렇지. 역시 바라는 게 있었구나.
일단 모르는 척 넘어갔다.
나는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꽤 독립적이라 믿었던 나도,
이 전화에는 멘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통화할 땐 잠시 마음이 편안해지다가도,
끊는 순간 다시 혼자 싸우고 있다는 감각이 몰려왔다.
익명남에게서 연락이 오면
곧바로 다른 세입자들과 공유했다.
한 집은 내 결정을 존중하며
“무슨 일이든 함께하겠다”고 했고,
그 통화가 끝나면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하지만 또 다른 한 집은 달랐다.
본인도 비슷한 연락을 받았지만
무서워서 피했다고 했다.
“난 이게 또 다른 사기 같다, 상황이 바뀌면 알려 달라.
다만 내 얘기는 그 남자에게 하지 말아 달라.”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진행 상황은 계속 공유받길 원했다.
이해는 됐다.
누구나 무서운 일에 앞장서고 싶진 않을 테니까.
아, 나도 같은 마음인데.
그와 연락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감정과 시간을 소모하던 내겐,
다른 세입자의 태도마저 또 다른 짐처럼 얹혔다.
마음 한켠엔 불안한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결국 손에 들어온 임대인의 집주소
다음 날, 업무 중 그의 메세지가 도착했다.
주소가 적힌 부동산 사이트 링크였다.
이번 주말 전까지는 찾아가야 한다고 했다.
돈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감사하다는 인사로 빠르게 대화를 끝마쳤다.
그와의 연락이 별다른 마찰 없이 끝났다는 사실에
커다란 안도감이 밀려왔다.
겉으로는 씩씩하게 맞서고 있었지만,
속에서는 여리고 어린 내가 숨죽여 떨고 있었다.
그의 지시에 따라
법에 접촉되는 행동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엄마에게 부동산 링크를 보내
이사 날짜만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후, 엄마에게 답이 왔다.
"예지야, 집 이미 나갔대. 이사 날짜도 알려줄 수 없대."
그제야 깨달았다.
집주인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이미 없어졌다는 것을.
그는 순순히 주소를 준 것이 아니라,
본인도 손 쓸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기에
자연스럽게 대화를 마무리했던 것이다.
소비한 마음과 시간이 떠올라 허탈하긴 했지만,
끝없던 불안과 의심에서 완벽히 벗어났다는 것으로
상황을 긍정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