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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전세사기 | 집에서 내쫓겼다. 이제 어디로 가지?

이사 갈 집을 찾기 위한 고군분투

by 예지

이 이야기는 작가가 직접 겪은 전세사기

피해 사실을 바탕으로 한 연재 형식의 글입니다.

첫 화부터 읽고 오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https://brunch.co.kr/@yezzy12/40




보증금이 없는데 어디로 가야하나요


전세사기를 당했던 그 집도

두 달 동안 회사 쉬는 시간까지 쪼개가며

겨우 고른 곳이었다.


그런데 1년 반 만에 또다시 이사라니.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하면

삶이 온통 그 일에 매몰될 게 뻔해

최대한 미루고 미루다

1월 말에 나가기로 낙찰자와 합의했다.


문제는 예산이었다.

전세는 쳐다도 보지 않았고

월세로 가야 했는데,

보증금이 빠듯했다.


신용대출, 청약 담보 대출,

친구들에게 미리 곗돈을 당겨 받는 방법까지

머릿속에 계산기를 두드렸다.


‘보증금과 월세는 최대한 아껴야 한다.’


마지막 월세집이 관리비 포함 1000/43,

8평짜리 원룸이었으니

월세 50을 넘기는 건 상상도 못 했다.




다시 부동산 문을 두드리다


서울에서만 5번째 이사이기에

부동산을 통해 집 알아보는 건 도가 텄다.

자신있게 부동산에 연락을 돌렸다.


1000/45 (관리비 포함)
2,7호선 역에서 도보 15분 이내
반지하 절대 ❌❌
넓은 원룸 or 1.5룸~투룸
구옥 환영


당연한 얘기지만,

저 조건에 맞춰 준다는 부동산은

어디에도 없었다.


"고객님 지금 4평짜리 원룸이

1000/50부터 에요"


"역에서 많이 멀어지면 몇 개 있어요

마을버스는 다니는데 어떠세요?"


사진으로 마음에 들었던 매물들은

90%가 허위매물이거나

1층 같은 반지하

또는 등산 수준의 옥탑이었다.


월세 50 이하로 서울 역세권

원룸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게다가 10평 이상의 투룸에서 살던 사람이

3-4평짜리 원룸에서 산다는 건

감옥에 들어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쩔 수 없이 예산을 올렸다.

1000 / 60 (관리비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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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45 -> 1000/55 업그레이드....




올린 김에 이 지긋지긋한 동네를

벗어나고 싶었다.


내 로망 속의 서울이라면

4-5평짜리 원룸도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하루는 날을 잡고

다른 구의 집들을 보러 갔었는데

진심으로 기가 막혔다.


화면 캡처 2025-07-30 171656.jpg 직접 찍은 사진은 아니지만 이 집 보다도 작은 반지하 였다. (출처 사진표기)


"이 집이.. 60이요?"

꽃무늬 벽지가 맞이하는 4평짜리

반지하 원룸이 60만 원이었다.

근데도 금방 나간단다.


나도 어찌 저찌 서울에 살고는 있지만,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너무 존경스러웠다.


다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악착같이 살고 있구나.


윗동네는 너무 높고

내 예산은 너무 초라하게 느껴진 탓에

빠르게 마음을 접기로 했다.




전세사기가 빚어낸 서울 월세의 현실



1000/60으로 예산을 올렸지만,

같은 평수에 역과 조금 가까워진 집이거나

투룸의 반지하 정도 뿐이었다.


"최근 전세사기 때문에

월세가 기본 5만 원씩은 올랐어요"


월세를 생각하니 한숨만 푹 나왔다.

자꾸 월세를 '버리는 돈'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나도 모르게 중개사에게

전세 1억으로는

어떤 방들이 있는지 묻고 있었다.


만났던 모든 중개사들은

입을 하나로 모아 전세는 들어가지 말라고,

본인들도 전세는 이제 중개를 안 한다고 했다.

전세사기는 알고도 당한다고.


"아 네.. 근데 저도 전세사기 당해 가지고

지금 이사 갈 집 구하는 거예요"


전세사기 얘기를 꺼내면

모든 중개사들이

열과 성을 다해 부동산 사이트를 뒤져줬지만

만족스러운 집은 나오지 않았다.


KakaoTalk_20250730_163435087_02.jpg 가장 마음에 들었던 집이었으나, 피해 주택과 같은 동네라 거부감이 들었다.


한 중개사는 위로하듯 말했다.


"저희 집도 엄마가 투자 사기를 당해서

빚이 20억이었어요.

그래도 갚으니까 갚아지더라고요.

아직 나이도 어린데,

일 조금 더 하면 되지~하면서

잘 이겨내 봐요. 안쓰럽네."


안쓰러운 사람이구나 나.

그럼에도 그 말은 위로가 됐다.

20억에 비하면 내 빚은 아무것도 아니지.




이사까지 2주 정도 남은 시점에도

나는 마음에 드는 집을

만나지 못했다.


도망치고 싶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까.

가면 친구들도 있고 가족들도 있고..

무엇보다 '우리 집'이 있었다.


‘일주일 전까지 집을 못 구하면

서울이 나를 내쫓는 거다.’


부동산을 돌고 오는 날은

유독 집이 아늑하게 느껴졌다.

전세 사기를 당한 그 집조차도

나를 포근히 안아주는 유일한 곳 같았다.


"다니는 회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물류 센터 일용직을 다녀오고,

내가 지금 사는 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부동산을 다녀와라."


몸소 겪은 교훈이었다.


SE-f4561a9f-2b62-46b7-ba7f-163bc5c04236.jpg 월세가 올랐으니 빡세게 살아야지. 낮에는 백화점 밤에는 쿠팡으로 출근을 했다.




그러다 괜찮은 집을 발견했다.

언덕배기에 있는 1.5룸.

3층이라 채광 좋고, 구조가 괜찮았다.

하지만 방이 작고 언덕이 가팔라

선뜻 계약할 수 없었다.


내가 고민을 하자 중개사 분이

"제가 예지님한테 꼭 보여드리고

싶은 집이 하나 있어요"

라며 비장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내셨다.


"아껴놓은 집이에요.

투룸에 1층, 2000에 50"


이때까지 집을 40개는 봤기 때문에

사진으로는 큰 감흥이 없었다.


"일단 가시죠."


중개사분의 차를 타고

비장의 카드인 1층 투룸으로 향했다.


집에는 갓난아기를 안은 한 할머님과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있었다.

아, 나 초등학생 보면 눈 돌아가는데.


집은 대충 보고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부모님이 교육을 잘하셨는지

별 다른 대답은 안 했지만,

처음으로 집을 보러 다니다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래서였을까,

고개를 돌려 다시 본 집이

처음으로 마음에 들었다.


KakaoTalk_20250730_163435087_03.jpg 가족들이 살아서 그런지 안락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3인 가족이 살았을 만큼 넓었고

10년을 살았을 만큼 보증된 집이었다.


월세로 10년? 이거 귀한 매물이다.


하루만 고민할 시간을 달라고 한 뒤

다음날 오전, 다시 그 집을 찾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계약금을 넣었다.




드디어, 살 집을 구했다.

1500 / 52, 1층 투룸.


그리고 한 달 10만 원 남짓의 전세대출 이자에서

52만 원의 월세로 업그레이드 됐다.

거기에 대출금까지 갚아가면...


젠장.

열심히 살아야지.

다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미우나 고우나 죽지 않고 잘 살았습니다


이삿짐을 싸기 시작했다.


이 집에서 어떻게 버텼나 신기하기도 하고

'사람은 미워해도 집은 미워하지 말아야지'라는

나만의 다짐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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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에는 좋은 추억도

곳곳에 묻어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웃음이 묻어있고,

중요한 날이면 책상 앞에서

밤을 지새우던 열정이 묻어있고,

거울 앞 나 자신에게 가장 솔직했던

순간들이 묻어있었다.


그것들을 그 자리에 남겨두고

새로운 집으로 나아갈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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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쌓은 추억들 ! !


그래도 2년 가까이 잘 지냈다고

집이랑 인사도 하고

좋은 주인 만나서 좋은 추억 많이 쌓으라고

소원도 빌어줬다.


그래, 이제 이 지긋지긋한 집도 안녕이다.




이사 당일,

엄마 아빠는 삼촌에게 빌린 탑차를 끌고

강원도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예정보다 약간 늦게 짐을 실었고,

텅 빈 방을 멍하니 바라볼 쯤

낙찰자의 대리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사 다 끝나셨나요?"

"네 지금 오시면 됩니다"


KakaoTalk_20250730_173026293_04.jpg 다시 텅 빈 집


낙찰자는 인감증명서와 명도확인서를 챙겨

집으로 들어왔다.

간단하게 집 살면서 큰 문제는 없었는지

집 비밀번호는 무엇인지

전기/가스 요금은 다 냈는지 확인을 하고

서류 두 장을 챙겨줬다.


그래. 이 종이 두 장.

이게 뭐라고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집에서 쫓겨나나 싶었다.


아니, 이 집은 내가 스스로 떠나는 거다.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사를 무사히 마치고 잔금을 치렀다.

여전히 마음 한켠이 무거웠지만,

새 집에서는 좋은 일만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슬금슬금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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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며 놓으니 참 예쁜 새 집에서 새출발 !




갑자기 걸려온 익명의 전화

이사 후 3주쯤 지났을까.


전세사기 건물의 관리인으로 알고 있던 사람이

익명의 카카오톡 계정과 나를 대화방에 초대했다.


곧이어 익명의 남성은

뜻밖의 이름을 꺼내며 전화를 걸어왔다.






다음 편에 '익명의 전화' 에피소드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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