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란,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이주란 소설가의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을 읽습니다. 이 소설을 처음 발견한, 제13회 김유정 문학상 수상 작품집에서입니다. 해당 소설이 표제작으로 실린 이주란 소설가의 단편집을 구매한 뒤에도 이 책을 펼쳐 여러 번 읽었습니다. 재독 할 때마다 펜의 색깔을 달리해 알록달록 줄을 치는 재미가 있었거든요. 어떤 부분에 줄을 쳤냐면, 아주 여러 군데에 쳤습니다.
“어떤 순간도 마지막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131쪽)는 화자의 독백.
“그랬겠지,라고 단정 짓지 않기 위해”(139쪽)같은 수식어.
“‘가장 좋아하는 책 = 두고 내리신 책’”(154쪽) 준호 씨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
“그리고 아침 햇살(송이의 가짜 술)”(155쪽) 같은 디테일들.
이외에도 아주 많은 문장에 밑줄을 쳤습니다.
왜 이 작품을 좋아하고, 왜 그곳에 밑줄을 쳤냐는 물음을 받을 때마다 전 머리를 긁적였습니다. 그냥 너무 좋고 송이의 가짜 술을 보며 눈물이 났거든요. 그래도 이유를 꼬치꼬치 묻는 사람들에게 그런 답변을 하곤 했습니다. 수많은 문학 작품들(특히나 젊은 작가들의)이 영상 매체로 변주되어 재창조 되는 요즘, 이주란 소설가는 소설로만 쓰여질 수 있는 소설을 쓰는 작가고 나는 그게 너무 좋다고요.
소설로만 쓰여질 수 있는 서사란 무엇일까요. 그를 위해선 드라마나 영화 같은 영상매체의 서사와 소설의 서사 차이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제가 생각하는 이주란 소설가의 특징과 강점을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주란의 작품들에는 수많은 구멍이 있습니다. 잔뜩이요. 그러나 이야기는 분명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치 구멍을 설계하고 사슬 모양으로 듬성듬성 뜨개질을 시작하는 크로셰 펀칭 니트처럼요. 그게 바로 제가 생각하는 이주란의 특징이자 강점입니다.
「한 사람을 위한 마음」에서도 그렇습니다. 고교 시절 절친했던 선배가 ‘왜’ 자살했는지, 언니는 ‘어떻게’ 죽었는지, M과 헤어진 ‘이유’는 무엇인지. 소설은 알려주지 않습니다. 선배는 이미 죽었고, 화자와 N은 장례식장에 갔지만 P는 가지 않았습니다. 언니는 이미 죽었고, 열 살이 된 조카 송이와 이모인 화자, 할머니인 엄마가 한 집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M과도 이미 헤어졌고, 화자는 M과 함께 했던 기억을 종종 떠올리며 살아갈 뿐입니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건 이별과 죽음을 비롯한 ‘원인’이 아니라 그 이후입니다. 상처는 이미 생겼고, 그로인해 생긴 흉터를 어떻게 안고 살아가는지가 중요합니다. 확정적인 결과는 없습니다. 이 소설에는 과정만이 담겨 있습니다. 이별, 유기, 죽음 이후 남겨진 사람의 과정에 집중하기.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들은 남겨진 사람들의 삶의 조각을 그대로 퍼올려 보여주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이주란 소설가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성입니다. 원인에 구멍을 뚫어 남겨진 사람들에게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죠.
한 편 다른 구멍들도 있습니다. 디테일의 구멍입니다.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의 주인공 ‘지영’은 <나는 자연인이다>를 좋아합니다. 한 번에 세 편을 연이어 보기도 하죠. 그러나 왜 좋아하는지, 특히 어떤 회차를 좋아하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주지 않습니다. P가 틀어주는 CCM의 곡명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화자가 들여놓으려는 새 책들의 목록도, 좋아하는 작가의 이름이나 작품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준호가 던지는 농담에 화자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저 좋아하고, 틀어주고, 들여놓고, 하던 일을 계속 할 뿐입니다.
바로 이 점이 제가 생각하는 ‘소설로만 쓰여질 수 있는 서사’를 위한 지점들입니다.
주인공 ‘지영’이 가장 좋아하는 TV프로그램은 <나는 자연인이다>입니다. 송이가 ‘자연인 이모’라고 부를 정도죠. 퇴근 후에도, 약속을 다녀온 후에도, 쉬는 날에도 이 방송을 시청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프로그램명만 알려줄 뿐, 지영이 이 방송을 좋아하는 이유나 특별히 좋아하는 회차 등은 알려주지 않습니다.
아무튼 집에 와서는 냉장고를 뒤져 이것저것 먹었다. 나는 <나는 자연인이다> 세 편을 연이어 보다가 평소보다 일찍 잠들었다.(130쪽)
그래도 무리가 없습니다. 문자로 이루어진 소설에선 그냥 ‘보다가 평소보다 일찍 잠들었다’는 서술어 하나로 해결되니까요. 이하 생략이 가능한 것이죠. 그런데 만약, 드라마나 영화 같은 영상매체였다면 어땠을까요?
#S03. <나는 자연인이다>
냉장고를 뒤지는 지영. 안에든 음식들을 이것저것 꺼내먹는다.
방(혹은 거실 소파)으로 들어가는 지영. 리모콘을 들어 MBN 채널인 18번으로 맞춘다. 윤택(혹은 이승윤)이 자연인과 함께 냇가에서 냉이를 씻고 있다. 세 편을 연달아 시청하는 지영. 티비를 끄고 잠에 든다.
더 자세한 디테일들이 필요해졌을 겁니다. 개그맨 윤택이 진행하는 회차인지, 개그맨 이승윤이 진행하는 회차인지부터 자연인들의 사연까지 골라내야 합니다. 잠시 스쳐지나가는 장면이라 할지라도, ‘<나는 자연인이다>를 좋아한다’는 설정은 지영의 캐릭터성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을 시청한 관객은 지영이 <나는 자연인이다>를 좋아하는 이유를 연출자가 지정한 방향을 따라 직관적으로 이해하거나 추측하게 됩니다. 자연인들이 도시에서 겪었던 고난 때문인지, 자연이라는 낭만 때문인지. 소박한 음식들 때문인지, 기상천외한 요리법 때문인지. 회차 내용과 지영의 시청 태도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영상 매체와 소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서사를 전달하는 단계에 있습니다. 소설은 문자로 쓰이기 때문에 작가가 직접 독자들에게 서사를 전달합니다. 물론 인물의 서술을 빌려서요.
반면 영상은 촬영된 이미지를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직접 말할 수 없습니다. 보다 더 많은 단계를 지나야 하죠. 가장 먼저 연출자인 감독을 거쳐야 합니다. 작품의 규모가 커진다면 조명 감독, 오디오 감독, 촬영 감독 등 연출자의 역할이 세분화 됩니다. 연출진은 연출의 방향을 정하고 촬영에 돌입합니다.
다음은 배우의 차례입니다. 배우는 각본을 보고 해석한 뒤 표현합니다. 표정과 몸짓, 어투를 통해 다양하게 자신의 해석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연출의 의도에 맞게 편집하는 과정을 거친 후에야 영상은 관객들에게 전달됩니다. 이렇듯 더 많은 단계를 거친다는 것은, 더 많은 이가 해석하고 정제한 방향성을 관객들에게 제공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영상 매체를 보는 관객들은 연출진들의 해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P가 트는 CCM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에선 그저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그게 CCM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서술어로 끝낼 수 있지만, 영상에선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노래인지를 선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사일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을 많은 이들에게 전도하며 살아야 한다는 가사일지…… 비슷해보이지만 연출자의 해석에 따라 달라지는 디테일을 통해 부각되는 P의 특성이 달라졌을 겁니다.
소설에도 물론 작가의 의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상매체와 달리 세세한 디테일들을 생략해 틈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를 통해 독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합니다.「한 사람을 위한 마음」에 있는 수많은 구멍들이 바로 그 틈이고, 여지를 마련하는 장치들입니다.
독자인 저는 130쪽을 읽으며 궁금했습니다. 지영이 수많은 방송 프로그램 중 하필 <나는 자연인이다>를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어떤 점이 좋은 걸까? 남성 중장년층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프로그램을, 왜 젊은 여성 청년인 ‘지영’이 애호할까? 궁금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제가 그 방송을 봤던 경험들이 떠올랐습니다.
대부분의 회차가 비슷한 구성으로 흘렀습니다. 먼저 낮에는 자연인의 터전을 보여주고, 생활양식을 보여줍니다. MC들이 함께 하며 즐거워하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가끔은 힘들고 당혹스러워하기도 합니다. 저녁이 되면 자연에서 채취한 식재료로 저녁을 차립니다. 정성스레 마련한 음식을 나눠먹으며 자연인은 자신이 자연으로 들어오게 된 경위에 대해 털어놓습니다. 대부분 사기를 당하거나 아픈 이별을 하는 등 인간관계에 대한 상처들입니다. MC는 첨언 없이 깊은 공감의 표정을 지으며 들어줍니다.
그들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시청하는 내내 도시에서 상처를 받은 자연인들이 자연으로 도피했다는 생각을 저는 가장 많이 했었습니다. 홀로 생계를 유지하시는 분도 계셨지만, 경제적 활동을 그만두고 산에 틀어박혀 가족들의 지원으로 살아가는 분들도 많이 보였거든요. 개인적으로 그 모습들이 무책임하다고 느껴졌고, 어쩌면 그 점이 이 높은 시청률의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었습니다.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지만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큰 상처받은 사람들의 욕구를 채워주고 있어서라고. 어쩌면 ‘지영’도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방송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요?
지난날들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밤. 그날들은 지나갔고 다른 날들이 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사실에 잠시 안도했던 적이 있었으나 어쩌면 그 사실이 싫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언제든 마지막이 될 수 있는 모든 날들을 비슷하게 만들며 살고 싶었다. 나 혼자 그런다고 되는 게 아닌 걸 알면서도. (154쪽)
그만둔다 말하자 “씨발년아 당장 나가” 윽박지르는 학원을 통해 돈을 벌어야 하는 가난에서, 죽은 언니 대신 어린 조카를 돌봐야 하는 책임에서, 자신을 묵묵히 기다려주는 K를 보며 느끼는 미안함에서, 그 모든 걸 껴안고 지나가는 시간을 견뎌야 하는 현실에서 벗어나 자연에 틀어박혀 선배와 언니와 M과의 이별에 멈추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물론 완벽한 정답은 알 수 없습니다. ‘지영’은 단순히 자연을 좋아하는 걸 수도 있고, 유기농 요리법을 좋아하는 걸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완벽한 정답이란 애초에 중요치 않습니다. 소설을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자신의 경험을 대입해 상상하고 추측하고 공감하는 독자들의 사유 확장이니까요. 바로 위에서 제가 했던 것처럼요.
이주란 소설가의 소설들에선 사건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인물을 다시는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든 사건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사건은 철저히 수면 아래 있습니다. 언뜻 보일듯 하면서도 물결에 흐려져 제대로 명확히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허한 구멍이 아닙니다. 이 역시 사슬뜨기처럼 만들어낸, 독자들이 개입할 틈을 마련하는 여지입니다.
다만 견딜 수 없는 불행을 마주한 인물을 잔잔히 조명합니다. 식사를 하고, 업무를 처리하고, 친구와 만나고, 조카를 데리러 가는 일상을 소화하는 인물의 삶을 그저 보여줍니다. 이 일상들은 언뜻 유기성이 확보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구멍 역시 패턴의 하나인 펀칭 니트처럼, 뚫려 있지만 강렬한 인물의 심리로 연결되어 소설로 존재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주란 소설가의 소설은 크로셰 펀칭 니트를 닮았습니다. 패션전문자료사전에 따르면 크로셰란 갈고리로 걸어잡다·갈고리 모양으로 구부린다란 의미로, 끝이 갈고리처럼 생긴 코바늘로 뜨는 편물을 말합니다. 코바늘을 이용해 손으로 짜 성긴 니트이죠. 이 방법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의 실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씨실과 날실이 직각으로 교차되는 직물과 달리 한 가닥의 실이 고리로 얽히며 만들어지기 때문에 가장 기본이 되는 방법이 바로 사슬뜨기입니다. 그래서 중간중간 구멍으로 패턴을 만드는 펀칭 니트를 만들 때도 주로 사용됩니다.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을 기점으로 이주란 소설가의 소설 쓰기는 조금 변한 듯합니다. 이전 작품집 『모두 다른 아버지』에서는 불행 뒤 남겨진 인물들의 여전한 불행과 우울에 더 많은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한 사람을 위한 마음」에선 보다 희망에 더 많은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또 이후에 쓰인 『수면 아래』 역시 불행과 우울보단 희망에 더 많은 초점이 맞춰져 있죠.
‘지영’이란 이름은 「사라진 것들 그리고 사라질 것들」에서도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그곳에서 ‘지영’은 자살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쓰여진「한 사람을 위한 마음」속 ‘지영’은 살아남아 단순히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나는 내가 남들처럼 괴롭지 않은 이유가 어쩌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143쪽)
여전히 관조적으로 자신의 가난과 불행을 바라보고 제 기분을 잘 모르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지만, 웃기도 울기도 하면서요.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한 사람을 위해 바치는 작은 마음들, 그러니까 서점 사장님 부부의 호의, 서점에 함께 가자는 준호 씨의 권유와 무료 파스타 한 접시, 할머니와 이모를 위해 떡볶이를 하고 싶어 하는 송이, 언니의 빈소에 가는 날 차를 빌려주고 둘의 사이가 멀어졌음을 알면서도 묵묵히 기다려주는 K……그들의 마음을 밀어내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웃기도 울기도 하면서요.
살아가야 할 앞으로의 날들을 숙제라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송이와 친구들을 위해 잘하지도 못하는 떡볶이를 만들어야 하는 건 숙제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147쪽)
또한 ‘지영’ 역시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의 작은 마음을 베풉니다. 친구들을 초대하고 싶다는 송이의 소원에 부흥하기 위해 직접 떡볶이를 만들고, 블랙윙 연필을 사오고, 사장님 부부를 위해 무화과 타르트를 사고, 입맛이 없다는 엄마를 위해 막걸리 두 병을 사고, 좋아하는 작가에게 진심으로 팬이라 말하고 준호 씨에게 농담을 건넵니다. 웃기도 울기도 하면서요. 이 과정에도 역시나 수많은 생략들이 담겨 있습니다. 독자들이 자신을 대입해 설 수 있는 미지의 땅들이 열려있죠.
펀칭 니트는 물론 시스루처럼 단독으로 입을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속에 받쳐 입는 옷을 입고 걸칩니다. 이주란 소설가의 소설들은 바로 이런 펀칭 니트를 닮았습니다. 서사가 짜인 성긴 그물 밑에 독자들 자신의 경험을 받쳐 입을 수 있다는 점에서요.
앞으로 이주란 소설가는 어떤 또 다른 펀칭 니트를 만들어낼까요. 서로 다른 다양한 경험을 가진 독자들에게 입혀줄 새로운 디자인을 앞으로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