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만 더
몇 시간 후면 어차피 내려올 가을산을 올랐다. 2024년 10월 말, 그것도 새벽 2시 30분에 헤드랜턴으로 깜깜한 길을 밝히며 설악산 공룡능선 산행을 시작했다. 누가 억지로 가라고 등을 떠민 것도 아니었다. 스스로 선택한 길. 나는 그 험난한 길 위에 스스로 나 자신을 올려놓았다.
12시간이라는 목표 시간을 넘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것이 나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비선대는 새벽 3시에 통과해야 낮 2~3시쯤 천불동 계곡을 거쳐 소공원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는 코스였다. 쉬운 산행이 아니었다.
전문 산악인들에 비하면 준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동네 뒷산을 다니던 내가 설악산의 대청봉, 오세암을 며칠 전 잠깐 다녀온 것이 전부였으니. 어쩌면 그건 무사 귀환을 위한 ‘설악산과 친해지기’였는지도 모르겠다. 하루 전엔 사전 답사 겸 비선대와 금강굴을 오르며 준비를 마쳤다.
그렇게 마주한 공룡능선. 주차장은 이미 전국 각지에서 모인 등산객들의 차량으로 가득 찼고, 새벽시장을 방불케 하는 불빛들로 환했다. 그 풍경을 뒤로하며 걸어가는 나의 마음은 적진을 향해 가는 전사의 각오 같았다. 나 자신과의 약속, 그리고 그걸 지켜내고 싶다는 책임감이 나를 일으켰다. 간간히 마주하는 사람들의 불빛은 무서움을 덜어주는 위안이었다.
처음엔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하지만 어제 가볍게 올랐던 그 길을 다시 오르자, 속도는 느려지기 시작했다. 새벽 3시를 조금 넘긴 시간, 목표한 시간보다 늦었지만 괜찮다며 나를 달래던 나는 곧 끝이 보이지 않는 가파른 오르막과 마주했다.
다리는 얼어붙은 듯 무거웠고, 우리 일행은 계속해서 다른 이들에게 추월당했다. 게다가 잠시 쉬면서 깔고 앉았던 돗자리를 그대로 두고 올라온 실수까지. 미안함, 자책,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몰려왔다. '에이, 괜찮아. 포기만 하지 말자.'라는 말이 속에서 공허하게 맴돌았다.
그 새벽에 오르는 사람들은 얼마나 능숙하던지. 나는 이미 낙오자가 된 듯이 뒤처졌지만, 어둠 덕분에 발밑에만 보고 걷게 되었다. 그래서 생각할 틈도 없이 앞으로만 걸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마치 우리 인생처럼, 힘들 때는 앞날을 내다볼 여유 없이 하루하루 버티는 것처럼.
겨우겨우 오르다 보니 동쪽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산 중턱에서 쉬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붉은 아침 해가 떠오르는 순간,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 순간, 내가 거기에 서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번 생에 설악산을 오를 줄이야. 나이가 들수록 기대를 줄이고 시도조차 꺼렸던 나였기에, 지금 내가 이 산 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생각만 하며 내려놓아야 했던 '나의 원함'이 결국은 '행동'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그 찬란한 아침이 알려주었다.
그때 먹은 연양갱은 세상 어떤 음식보다 달았다. 시원한 비타민음료와 콜라는 힘을 북돋워주었고, 마음 깊은 곳에서 '잘 왔다'는 말이 반복해서 들려왔다.
“조금만 더, 다 왔어.”
그 말을 몇 번이나 듣고, 되뇌며 걸었을까.
마등령 삼거리까지 오르면 가장 힘든 구간은 끝이라고 했다. 그 말을 몇 번이고 되뇌다 진짜 마등령에 다다른 순간, 나는 깨달았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내 발걸음은 결국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다른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때부터가 진짜였다. 마등령 이후부터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산행이 시작되었다. 발걸음은 가벼워졌고, 주변 사람들도 어느새 생기가 돌았다. 산 위에서 먹은 김밥, 따뜻한 커피 한 잔은 그야말로 생명의 불을 붙이는 꿀맛이었다.
이어서 나한봉, 큰 새봉, 1725봉, 신선대, 무너미 고개의 바윗길을 오르내렸다. 보호막대를 이용해 암벽을 오르고 내리기도 했다. 그것들은 내가 오래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것들. 마등령 이후에야 비로소 느낄 수 있었던 스릴. 그것은 정상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다른 산악인들과도 무언의 교감이 오갔다. 공룡능선을 올라야만 누릴 수 있는 호사들. 포토존에서는 서로 순서를 양보하며 사진을 찍었다. 그 사이사이 오간 배려와 웃음은, 쉽지 않은 여정 끝에 얻은 소중한 선물이었다.
특히 기억나는 에피소드 하나. 킹콩바위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며, 일행 중 한 명이 킹콩의 완전체가 나오지 않았다며 아쉬워했다. 결국 AI로 편집해서 거대한 킹콩 앞에 마주 서 있는 모습을 만든 후, 무척 만족스러워하며 웃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그렇게 천불동 계곡을 거쳐 다시 비선대로, 그리고 주차장에 도착했다. 내 몸은 완전히 녹초가 돼 있었다. 발가락엔 물집이 터질 듯했고, 무릎은 찌릿하게 통증이 올라왔다. 화장실이 급한 상황까지 더해져 한걸음도 떼기 힘들었다.
무려 15시간. 길고도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뿌듯함이 온몸에 퍼졌다. 그것은 지금도 나를 웃게 하는 힘이 되어준다.
에필로그
산보다 높았던 건 결국 나의 의지였다. 그 산은 결국 내가 나를 끝까지 데려가는 여정이었고, 나는 그 길에서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앞이 보이지 않는 새벽 같은 길일지라도, 한 걸음씩 내딛다 보면 결국 동이 튼다.
그러니 오늘도 한 걸음 내딛는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 산에 나를 올려놓을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한 걸음들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