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낸 마음들/진짜 마음의 말
우리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랑을 주는 방식이 누군가에게는 짐이 될 수 있다는 걸
늦은 시간에야 깨닫곤 한다.
마음속 깊이 눌러두었던 감정은
조용히 곪아가다가, 마침내 넘치듯 터져버린다.
그건 누군가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너무 오래 참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감정이 터질 때,
비로소 우리는 ‘말하지 못한 사랑’의 무게를 깨닫는다.
그것은 아프지만, 진심이다.
손마디로 머리를 꾹꾹 눌러본다.
정수리 근처를 지날 때마다
어디선가 은근한 통증이 일어난다.
그 지점을 누르면, 찌릿하게 아프지만 동시에 묘하게 시원하다.
막힌 혈이 뚫리는 느낌이다.
그 감각은 어젯밤, 내 마음에서도 일어났다.
“엄마 때문에 성격이 이렇게 된 거예요.
제발 소리 좀 지르지 마세요.”
이어서 먹다 남은 아들의 밥그릇이 싱크대에 탁, 부딪히는 소리.
그보다 더 크게 울렸던 건 아들의 속마음이었다.
한동안 고요하던 아들의 마음에 언젠가는 비가 내릴 줄 알았지만,
그날이 오늘일 줄은 몰랐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식탁 위엔 시래기 감자탕이 무심한 듯 식어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사 이야기,
짐 옮길 계획까지 서로 도우며 웃던 대화들이
잠시 사이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이유는 분명했다.
아들이 계약한 원룸의 공동명의, 신탁회사 관련,
거기에다 임대차 보호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말에
내가 본능적으로 반응하면서 시작되었다.
“왜 하필 이런 복잡한 집을 골랐어?”
“나한테 먼저 물어보지 그랬니?”
그 말속에는 아들을 향한 불신보다
그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조바심이 더 컸다.
그런데 그 조바심이 아들의 의지를 꺾는 언성이 되어
결국 폭발의 방아쇠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나의 반응을 예상치 못한 아들 또한
갑자기 굳은 표정으로 그동안 눌러왔던 말을 터뜨렸다.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해서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잖아요.”
그 말이 내게 비수처럼 꽂히는 대신
묘하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래..’
결국 터질 말이었다. 어느 날은 이런 일이 있어야
비로소 네 속마음을 다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예감했던 그 순간이다. 마음이 미어졌어야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나는 내심 참다못해 터뜨린 그 한마디에
낯선 안도감을 느꼈다. 그 감정의 분출을 반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괜찮아. 이참에 다 쏟아내도 돼.’
마음 한편에서는 그렇게 말하며 아들의 감정을 응원하고 있었다.
이게 사랑의 역설일까.
아들은 온순한 아이였다.
사춘기 없이 자란 것처럼 조용했고, 순응적인 편이었다.
그래서 늘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이 세상의 날카로움 속에서 너무 조용한 아이는
언제 다칠지 모른다는 보호본능이
언젠가는 터져야만 하는 순간을 데려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네가 가야 할 길을 조금 앞서 걸었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까 길을 살폈고,
때로는 대신 넘어져 보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네게는 사랑보다 더한
지시로, 간섭으로, 소리치는 사람으로
들렸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네가 말하는 중간중간에,
나는 그 말을 내 마음으로 껴안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놀랍도록 담담한 채로 말이다.
왜냐하면, 그건 사랑이었다.
말하지 못한 사랑.
나도 몰랐던 내 미안함이
너의 말에서 형체를 드러내고,
내가 외면했던 너의 감정들이
마침내 물살이 되어 흘러나왔다.
‘엄마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말에
과거의 나, 지금의 나, 그리고 네가 바라보던 내 모든 모습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무너짐이 곧 무력함은 아니었다.
그건 치유의 시작이었을 뿐.
막혔던 마음의 길이, 뚫리는 소리였다.
한편으론 가슴이 아픈데, 왠지 모르게 오히려 후련함이 일었다.
아들이 드디어 속엣말을 했구나.
아들을 향한 ‘이해할 수 없는 그 침묵’이 해명되듯이
터져 나온 그 자리에서 나는 조용히 아들의 감정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 말했다.
‘잘했어, 아들아.
너, 정말 잘 참아왔구나.’
그 순간,
부동산 계약에 관한 내 걱정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건 단지 상황일 뿐.
지금 내 앞에 선 너의 마음이 진짜 현실이었다.
너의 말속에는,
나를 향한 원망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건
자기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절박한 선택이었다.
사랑이 지나치면, 지켜주려는 마음보다
짓누르는 무게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지금에야 조금 알 것 같다.
그래서 이제는 아들의 인생 앞에서
한 발 물러서는 법을 배워야겠다는 굳건한 다짐을 해본다.
에필로그
그날 밤, 나는 어쩌면 처음으로
엄마가 아닌 ‘한 사람’으로
아들의 마음을 마주한 것 같다.
내가 키운 아이가 아니라,
내 앞에 선 ‘자기 삶의 주인’인 사람으로.
아들의 감정은 오래 묵었고, 그 감정은
사랑이 만들어낸 무게이기도 했다.
우리가 서로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지켜주려 했고,
그 지킴이 때론 억압이 되었다는 걸 이제는 느낀다.
그리고 나는, 이 말을 아들 너에게 꼭 전하고 싶다.
“너의 성격은 아무 문제없어.
엄마보다 훨씬 단단하고,
더 멀리 볼 줄 아는 멋진 사람으로
잘 성장하고 있는 중이야.
사랑으로 키웠지만, 그 사랑이 너를 짓누를까 봐,
이제는 네 삶을 온전히 너에게 맡기고 싶어.
엄마는 항상 네 편이야.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늘 그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