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내가 작아지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 관계의 힘은 기울어진다.
좋은 마음으로 건넨 말에 돌아온 냉랭한 대답 하나가
하루를 흔들고, 마음의 온도를 낮춘다.
그 작은 틈에서 나는 배우게 된다.
사랑이란 무엇으로 지켜지고, 무엇으로 무너지는지를.
“오늘 만날까요?”
좋은 마음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뭘 만나!”
얼음보다 더 차가운 반응이었다.
그 순간, 갑과 을의 관계가 된 듯한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무슨 일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더는 듣고 싶지 않은 마음까지 느껴져 그만두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어디서 그의 마음을 건드렸지?
원인 모를 미안함이 앞섰고, 말문이 막혔다.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뒤에 아무런 연락이 없다.
그냥 기분이 안 좋았던 건가?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닐까?
한참을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흘려보내려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한마디는 점점 마음속에서 웅웅 거리며 울렸다.
‘내가 왜 그 말에 이처럼 휘둘려야 하지?’
‘왜 내가 쩔쩔매고 있는 거지?’
이런 내 모습을 자각하는 순간
내면에서 자책과 짜증이 한꺼번에 올라온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이건 사랑이 아니라, 관계를 장악하려는 일방적인 태도는 아닐까?
그의 냉담함은 어느새 내 마음을 깊숙이 파고들어
명치끝을 툭 건드리는 통증으로 나타났다.
내 몸은 그 감정의 무게를 정직하게 감지한 듯했다.
이런 반응은 사실 한두 번이 아니다.
뚜렷한 이유 없이, 자기 안의 감정만으로
나에게 무심하거나 때로는 히스테리컬 한 반응을 보였다.
그때마다 나는 놀라고, 무너지고, 아파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비대칭적 감정 반응’.*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그의 무표정과 차가운 반응에서
감정적으로 철회하는 회피형 애착의 전형적인 특징을 볼 수가 있다.
반면, 나는 불안형 애착의 반응처럼
그의 기분 변화에 과도하게 민감해지며 감정의 틈을 메우려 한다.
결국 우리는 감정 표현의 패턴이
비대칭적인 채로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예전 같으면 부랴부랴 그의 마음을 풀어보려 애썼겠지만
이젠 그러고 싶지 않다.
그래서, 무너진 마음을 추슬러보려 시장을 봤다.
대형마트에 가서 사고 싶었던 것들을 주섬주섬 카트에 담았다.
매번 마트에 올 때마다 눈으로 마음으로만 담아두었던 품목이다.
물거품 세안비누, 영양제, 요가매트, 반려견 간식,
그리고 시식 코너에서 맛보았던 만두와 비타민 음료까지.
총합 37만 원. 생각보다 많은 금액이 나왔다.
‘그래도 이 정도야.’
마음의 공허함을 물건으로 메우려 한 건지도 모른다.
그 순간만큼은 상한 마음에 무언가라도 채우고 싶었던 것이다.
후련한 듯 후련하지 않았다.
그에게 왜 그랬냐고 따져 물어보지 않은 게 후회로 남은 까닭이다.
"미안했어."
늦어도 좋으니 그 한마디라도 들었더라면,
지금의 허탈함은 조금 덜했을지 모른다.
때로는, 말의 의도보다도 그 형태와 맥락이 더 중요하니까.
상냥하지 못한 말 한마디는
사람을 참 우습게 만든다.
그 말에 깔린 무례함과 무심함은
그 사람의 미성숙한 감정을 드러낸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런 말에 흔들리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관계 속에서 내가 작아지는 순간들에
내가 더 이상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사랑은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에 있다**고 한다.
그 과정은 서로의 다름을 돌봐주는 시간이고,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살피는 태도다.
그의 무뚝뚝함을 사랑이라 착각하지 말자.
그의 냉담함을 인내로 바꾸지 말자.
그의 감정 기복에 내 자존감을 담보 잡히지 말자.
이것이 오늘 내가 지켜낸 마음들이다.
사랑은 나를 돌보는 일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그리고 관계는 상대의 말보다
내가 나에게 어떤 말을 건네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에서
나는 오늘도 나의 마음을, 나의 사랑을 배운다.
에필로그
한 사람이 자꾸 작아지는 관계는,
결국 누구에게도 건강하지 않다.
상대방의 눈치 보다
내 마음의 진심을 먼저 살필 수 있다면,
그런 관계야말로,
사랑을 넘어서 서로를 지지해 주는 진짜 '동행'이 된다.
*비대칭적 감정반응(심리학적 개념)
-애착 론 (Attachment Theory), 존 볼비, 메리 에인스워스
-감정 조절 이론 (Emotion Regulation Theory), 제임스 그로스
-상호의존 이론 (Interdependence Theory), 존 티보 & 해럴드 켈리
Labor), 아를 리-감정노동 이론 (Emotional Labor),아를리 호크실드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인생수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