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진화하고 있다

by 읽는 인간

퇴직한 다음 날 아침이었다.


늘 일어나던 시간에 잠에서 깼지만

더 이상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베개에 얼굴을 묻고

늦잠을 즐길 행복감에 취해 있었다.


그때 남편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여보 일어나, 아침 해야지”

그 한마디가 백수로 맞는 첫 아침의

달콤한 행복감을 완전히 날려 버렸다.

나는 분기탱천했다.

남편이란 인간이 저렇게 무신경하고

인정머리가 없다니.


나는 체질이 천생 올빼미다.

아무리 피곤해도 밤엔 자고 싶은

일이 없고 숙면 여부에 관계없이

아침엔 일어나고 싶은 일이 없다.

그런 내가 직장 다니느라 매일같이

새벽밥을 하고 출근했는데

어떻게 내일도 아니고 오늘,

밥 달라고 나를 깨울 수 있을까?

나는 남편을 맹비난했다.

남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맹구 같은 표정으로

“어, 알았어. 그럼 더 자”하더니

일어나 혼자 뭘 챙겨 먹었는지 출근했다.

나는 알람을 해제해 버리고

다음 날 아침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날 저녁에 음식을 넉넉히 해놓으면

남편은 군말 없이 혼자 아침을

챙겨 먹고 출근했다.


나는 딱 한 달만 늦잠을 자고

그 후엔 남편에게 다시 아침을

차려줄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에 남편이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다.

과체중이었던지라 몇 년 전부터

고혈압, 고지혈증 진단을 받고

관리 중이었는데

이번엔 간 수치까지 정상 범위를

넘어섰다.

위기감을 느낀 남편은 본격적으로

다이어트에 돌입했고,

점심만 일반식을 하고 아침, 저녁은

밥이 아닌 다른 것을 먹겠다고

선언했다.

할렐루야! 복음이 따로 없었다.

나 아닌 남이 차려주는 점심에만

밥을 먹겠다니!

그렇게 해서 아침엔 비트, 사과,

바나나, 키위 등으로 만든 주스를 먹고

저녁엔 닭 가슴살 샐러드를

먹게 되었다.

‘국’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결혼하자마자 시어머니께서는

나를 앉혀 놓고 엄숙하게 말씀하셨다.

“네 남편은 꼭 국물이 있어야 밥을

먹는단다”

남편과 나는 둘 다 풀타임

직장인이었지만,

그때부터 나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국을 끓이고 아침을 차렸다.

국물은 남편의 소울 푸드였다.

그런데 이십여 년 만에,

신혼 초 어머니가 걸어 놓은

국물의 주문에서 풀려나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패스워드는 ‘지방간!’이었다.

퇴직한 지 사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늦잠을 잔다.

남편은 아침형 인간이다.

새벽 다섯 시든 여섯 시든 잠이 깨면

오 분도 더 누워있지 못하고

일어난다.

처음엔 남편이 주스를 갈아먹고

출근한 뒤

과일 껍질과 주스가 잔뜩 묻은 컵,

블렌더 등이 개수대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 아침에 시간 여유가 있어서인지

언제부턴가 자신이 만든 설거지거리는

스스로 처리한다.

내가 마실 주스도 한 잔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둔다. 기특하다.

그렇게 사 년 넘게 다이어트를 한 덕택에

남편은 10킬로 이상 감량에 성공해

체중이 정상 범위에 들어왔고

고지혈증과 간수치도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개구리가 마법에서 풀려나

왕자님으로 변모한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남편은 ‘국물남’에서 ‘샐러드맨’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잠에 취한 아내를 흔들어 깨워

아침밥을 얻어먹던 곰탱이에서,

늦잠 자는 아내를 위해 과일 주스를

만드는 산뜻한 개념남으로 거듭났다.


‘우리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겁니다’라는 노랫말이 있다.

남편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는 현재, 영식님(집에서 밥을

한 끼도 먹지 않아서 주부들이

열광하는)과 일식군(집에서 밥을

한 끼만 먹는 상당히 준수한)의

사이 어디쯤에 위치해있고,

앞으로도 진화를 계속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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