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후 한동안 내가 어떻게 결혼이라는 무시무시한 선택을 할 수 있었는지 스스로 신기해한 적이 있다.
나는 극심한 결정 장애를 갖고 있다.
셔츠 한 벌, 신발 한 켤레를 사더라도 그것이 꼭 필요한지 확신하는 데 몇 달이 걸리고, 온오프라인의 여러 매장을 뒤져 적당한 가격대의 가장 좋은 상품을 찾아내는 데
또 한참이 걸린다.(물론 이때의 가장 좋은 상품이란 순전히 나의 주관적인 판단일 뿐이다)
이런 나에게 ‘배우자의 선택’은 거의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물론 사랑에 빠져 맹목적으로 결혼하는 방법이 있었겠지만 나는 불행히도 그런 것에 온전히 빠질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먼저 결혼한 선배나 친구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언제나 ‘어떻게, 무슨 근거로 그렇게 중차대한 결정을 내렸는가’였다.
소개팅과 연애, 결혼식, 신혼여행, 집들이 등 일련의 통과의례가 끝나고 일상으로 복귀한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자신에게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나는 왜, 무슨 근거로 다른 누구도 아닌 이 남자와 결혼했을까?’
고심 끝에 찾아낸 답은 ‘대화가 통해서’였다.
일 년 남짓한 우리의 연애는 그저 대화의 연속이었고, 결혼 후에도 새벽까지 대화를 멈출 수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다음 날 출근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우리는 서로 등을 돌리고 누워 억지로 대화를 중단해야 잠들 수 있었다.
친정 식구들은 모두 말수가 적고 말주변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나도 어떤 자리에 누구와 함께 있든 늘 남의 말을 듣는 편이지 나서서 말하는 편이 아니었다.
남들에게 들려줄만한 얘기도 별로없었고,
내 생각이나 의견을 말할 때도짧게 사실을 말하는 데 그칠 뿐, 내 입장을 길게 설명하거나 나의 경험이나 느낌을 시시콜콜 친절하게 전달하는 일엔 영 소질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남편의 달변과 다변은 매력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비롯해서 자신의 학창 시절 이야기, 일에 관한 이야기, 사회문제나 종교에 관한 이야기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에 나는 싫증을 낼 줄 몰랐다.
그와 있으면 나는 어색한 침묵 같은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 좋았고,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나를 상대로 마음껏 할 수 있어 신이 났을 것이다. 나라면 창피해서 숨기고 싶을 것 같은 어린 시절의
부끄러운 이야기나 실수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유쾌하게 이야기할 때면,
그 순수하고 꾸밈없는 모습이
그 자신과 나에 대한 자신감과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는 꽤 잘 맞는 한 쌍의 퍼즐 조각이었다.
우리가 만난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
그가 청혼을 했고,
나는 ‘이 사람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너무 무모하지 않나’라는 생각에 황당해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저렇게 나오는 데는 뭔가 나름 확신이 있나 본데 거기에 한 번 기대 볼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확신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만
결국 그의 무모한 자신감이 나의 결정 장애를 압도했고 그렇게 나도 결혼 같은 것을 하게 되었다. 돈키호테와 햄릿의 만남이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대화가 통해서'는 순전히 나의 착각이었다.
'구애의 대화'와 '생활의 대화'는 다른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화가 통하는 순간보다
'불통의 벽'에 부딪히는 일이 잦아졌다.
그는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나는 남의 말을 들어주는데 약간의 소질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유전자를 남기라'는 준엄한 자연의 명령을 거부할 만한 강단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결혼한 지 삼십 년이 지났지만
남편은 변함없이 나와 대화하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자주,
‘저 사람은 짧게 말할 수 있는 얘기를 왜 저렇게 늘 길게 늘어놓는 걸까?’하는 생각을 한다.
심지어 남편이 신이 나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을까 봐 그에게 말을 걸 때 늘 신중하다.
그가 나에게 뭔가를 알려주고 싶어서 길게 설명을 할 때면 맨스플레인 mansplain처럼 느껴져 짜증이 나는 것을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TV로 야구중계를 보거나 영화를 보고 있을 때 남편이 말을 걸까 봐 불안해한다.
생각해 보면 남편은 우리가 처음 만난 날 이후로 한결같다. 나와 대화하기를 좋아하고
내가 호응해 주면 아이처럼 행복해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남편이 가구처럼 말없이 그저 늘 같은 자리에 있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변한 것은 나이고 이런 상황이 불만스러운 사람은 나보다는 남편일 것이다. 그러나 삼십 년 넘게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더 이상 새로운 레퍼토리도 없고, 남편이 ‘내 생각에는 말이야’까지만 얘기해도 그 뒤에 이어질 그의 생각을 다 알 것만 같고, 그럼에도 불구하 그의 이야기에 끝까지 집중하기에는 나의 인내심이 부족하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대화를 하다가 가끔 내가 TV에 정신이 팔려 자신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고 있는 것을 눈치채면, 남편은 나에게 절대 ‘응’이라고 답하면 안 되는 뜬금없는 질문을 한다. 나는 남편의 의도를 알면서도 모른 척 태연하게 ‘응’이라고 대답한다.
몇 초 동안 어색한 공기가 흐르고 눈이 마주치는 순간, 우리는 폭소를 터뜨리고 남편은 그만 대화를 이어갈 의지를 잃고 나는 마음 놓고 TV에 집중한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란다. 남편은 앞으로도 늘 그대로일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삼십 년 전, 남편의 이야기를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집중하던 눈먼 토끼와 같던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의 말에 한쪽 귀를 열어 놓고도
내가 원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기술을 익혀야 할 것 같다.
나는 본래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하지 못한다. 책에 몰두해 있으면 주방에서 타는 냄새가 나도 한참이 지나서야 알아차린다.
남편의 이야기에 적당히 리액션을 하면서 다른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시도를 하고 뇌의 안 쓰던 부분을 활성화하면 치매를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대화의 신기술을 부지런히 익혀서
죽는 날까지 치매에 걸리지 않고 온전한 정신으로 남편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으면, 우리의 결혼도 그런대로 해피엔딩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