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설광 시대

서사 중독자의 독백

by 읽는 인간

나는 소설 읽기를 좋아한다. 세상에 재미있는 소설이 얼마나 많은지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어서 행복하다. 하긴 읽은 소설을 또 읽어도 재미있다. 젊었을 때는 그래도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었다. 종교나 사상에 관련된 책에 몰두한 적도 있었고 사회과학 책이나 에세이도 읽었고, 아이들을 키울 때는 교육이나 심리학 관련 책도 자주 읽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점차 소설 외의 책들은 잘 읽지 않게 되었다. 특히 최근 몇 년 동안은 미스터리 소설을 주로 읽었다. 자주 가는 작은 도서관에 있는 미스터리 소설은 거의 다 읽었을 정도이다. 전에는 미스터리 소설이 뭔가 문학적으로 작품성이 떨어지는 흥미 위주의 수준 낮은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미스터리 소설에 대한 수요가 많아서인지 요즘엔 흥미진진하면서 작품성 면에서도 손색이 없는 미스터리 작가들이 굉장히 많다.

특별한 이유는 없는데 나는 주로 외국 작가들의 소설을 읽는다. 두 권으로 나뉘어 있어서 합하면 천 페이지가 넘거나, 한 권인데 칠팔백 페이지에 달하는 장편 미스터리 소설도 많이 있다. 그런 책들은 대부분 스토리가 복잡한데, 나는 집중하지 않으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스토리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올 때면 기대감으로 가슴이 설렌다. 행복한 장거리여행을 예약한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좋아하는 간식거리를 잔뜩 쟁여 놓은 것처럼 든든하기도 하다. 물론 한 편으로는 지나치게 편식을 한다는 생각도 하지만 도서관에서 책을 고를 때면 한참 동안 서가를 매우 신중하게 훑어본 후에 결국 손이 가는 것은 미스터리 소설이었다. 머리를 쓰고 생각을 하기보다는 그저 흥미로운 줄거리를 따라가며 서스펜스와 스릴에 푹 빠지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지지부진하고 남루한 현실에 결핍된 도파민을 충전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자신에 대한 만성적 회의로부터의 도피였거나.


일단 그런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 일상생활에 심각한 지장이 생긴다. 당장 해야 하는 일을 제외한 모든 집안일은 방치된다.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종일 책에 코를 박고 있기 때문에 소화도 잘 안되고 눈은 피곤하다 못해 침침하고 뻑뻑하고 아프다. 아픈 눈을 마사지도 해보고 가늘게 뜬 채로 읽어보기도 하고 인공눈물의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 읽기를 강행한다.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서 좀처럼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한참을 몰두해 있다가 정신을 차려 보면 숨을 참고 있었는지 긴 한숨을 몰아쉬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읽은 소설이 일 년에 평균 100권 정도에 달했다. 그런데 쉴 새 없이 허겁지겁 읽어 치우기 때문에 거의 기억을 못 한다. 작가 이름은 물론이고 줄거리나 결말 같은 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 잊어버리고,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를 기억하면 아주 훌륭한 경우이다. 읽은 책을 못 알아보고 또 빌려오는 일도 드믈지 않다. 읽지 않은 책인데 왠지 모르게 표지가 낯이 익다 싶은 책을 빌려다 읽다 보면 아니나 다를까 이미 읽은 책이다.그래도 대부분 끝까지 다시 읽는다. 결말이 생각나지 않아 너무 궁금하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를 쓰고 있으니 뭔가 점점 중독자 같은 느낌이 든다. 대상이 책이었기 망정이지 다른 유흥이나 도박 같은 것에 손을 댔다면 패가망신했을지도 모르겠다.


작년에 읽은 책은 스무 권이 채 되지 않는다. 늘 가는 도서관에 있는 웬만한 미스터리 소설을 다 읽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소설에 대한 열정이 살짝 시들기도 했다. 가장 큰 이유는 눈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눈이 너무 피로하기도 하고 안과검진도 한 번 해 볼 때가 되었다 싶어서 병원에 갔다가 녹내장 진단을 받았다. 백내장은 많이 들어 봤는데 녹내장은 생소한 병명이었고 백내장보다 훨씬 심각한 병이었다. 의사는 눈을 많이 쓰는 것과 녹내장 발병은 별로 관계가 없다고 했지만 나는 무지막지한 나의 독서행태를 후회했다. 그리고 눈을 더 이상 혹사하지 않기 위해 미스터리 소설을 멀리하기로 했다.


내가 책을 읽는 유일한 이유는 읽는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서다. 책을 읽고 나서 거기서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거나 심오한 의미나 작가의 숨은 의도를 찾아내는 따위의 분석을 싫어한다. 그저 책을 읽으면서 몰입하고 즐거우면 그만이다. 어쩌면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게으른 천성 탓에 머리를 쓰기 싫어서일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내가 본 책이나 영화에 대한 감상을 물어오면 아무리 감동적이고 훌륭한 작품에 대해서도 '재미있다'거나 '괜찮아' 정도의 답변이 고작이다. 가끔은 그런 내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책이란 '마음의 양식'이기는커녕 그저 온갖 인간 군상과 혼란한 이야기로 마음속을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TMI' 같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과도하고 일방적인 입력과 출력 사이의 불균형으로 인한 일종의 동맥경화가 나의 시신경을 공격하는 것은 아닐까?


앞으로는 책을 좀 선별해서 절제하면서 읽으려고 한다. 지난 몇 년간의 광적인 책 읽기에서 벗어나 앞으로는 좀 차분하고 지적인, 양보다 질에 치중하는 독서를 해보려고 한다. 지난 수십 년간 혹사한 눈도 좀 쉬게 하고 마음속에 뒤죽박죽 얽혀있는 독서의 잔해들도 정리를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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