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아껴서 무엇에 쓰려고?

호칭의 단순화

by 읽는 인간

나는 다양한 호칭으로 불린다. 집에서는 엄마와 여보라고 불리고 친정에서는 주로 이름으로 불리거나, 누나, 고모, 이모 등으로 불린다. 시가에서는 에미, 새언니, 동서, 제수씨, 작은 엄마, 외숙모, 아무개엄마라고 불린다. 그리고 밖에서는 언니, 형님, 자기, 선생님, 어머니, 아줌마, 사모님, 고객님 등으로 불린다. 활동 범위가 좁고 대인관계도 비교적 단촐한 사람인데도 호칭이 거의 이십 개에 가깝다.


잘은 모르지만 이렇게 호칭이 다양한 나라가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미국의 경우는 거의 이름을 부른다. 이름을 모르는 낯선 사람인 경우 남자는 sir, 여자는 ma'am이라고 부르고, 이름을 알지만 거리감이 있거나 격식을 차려야 할 경우 성 앞에 Mr.나 Ms.를 붙여 부르거나 그냥 sir, ma'am을 쓴다. 직장이라고 해서 우리처럼 직책을 부르는 일은 없다. 의사나 박사를 닥터라고 부르는 정도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조금 더 복잡하다. 친밀하고 격의가 없을 경우 이름을 부르고, 가장 무난하고 흔히 쓰이는 호칭은 성에 ‘상’을 붙이는 것이다. ‘상’은 우리말의 ‘씨’에 해당된다. 영어와 달리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쓴다. 가령 이웃 사람이거나 아들의 친구 엄마 정도의 관계이면 ‘강씨’, “박씨‘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의사나 교사를 ’센세이‘라고 부르는데 한자로 쓰면 선생이다. 우리처럼 ’님‘과 같은 접미사는 붙이지 않는다. 의사나 교사가 아닌 어떤 사람을 ’센세이‘라고 부르는 경우에는 상당한 정도의 존경심을 표하는 것이고 우리처럼 아무에게나 쓰지 않는다. 직장에서는 우리처럼 주로 직책을 부른다. ’가쬬‘ ’부쬬‘, ’샤쬬‘ 등으로 부르는데 각각 한자로 과장, 부장, 사장이라고 쓴다. 역시 우리처럼 ’님‘에 해당하는 말은 붙이지 않는다. 사장님을 ’사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말의 과장, 부장, 사장 등의 용어는 일본어에서 가져온 것인데 거기에 우리는 ’님‘을 붙여 쓰고 있는 것이다. 상대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이름을 모르거나, 이름을 알아도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되는 경우, 우리처럼 아줌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처럼 손 위 형제를 언니(누나), 형(오빠)이라고 부르는데 언니와 누나의 구분이 없고, 형과 오빠의 구분도 없다. 우리말보다는 덜 복잡하고 영어보다는 좀 더 복잡하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미국인이라면 이름 외에 네 가지, 일본인이라면 대략 여섯 가지 정도의 호칭으로 불릴 것 같다. 어느 쪽이든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이십여 가지의 호칭보다 훨씬 적은 숫자이다. 왜 한국의 호칭은 이렇게 다양하고 복잡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가능한 이름을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친족 관계의 손아래 사람이거나 학교 동창과 후배, 직책이 없는 직장의 후배 정도만 이름으로 부른다. 그 외의 사람을 이름으로 부르는 건 만취했거나 대단히 싸가지가 없거나 대놓고 싸우자고 덤비는 경우이다. 많은 경우에 이름을 부르는 것이 예의가 없고 위아래 구분도 못하는 몰상식한 행태로 여겨지는 것이다. 아이일 때 우리는 모두 거의 항상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함부로 이름을 불러도, 이름으로 불려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름 부르는 것을 삼가고 상황과 관계에 따라 다양한 호칭을 쓰는 데는 뭔가 내가 모르는 복잡한 문화적 이유가 있을 것이다. ‘동방예의지국’같은 고색창연한 가치를 들고 나오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예의나 존경심이 복잡한 호칭에서 우러나오지는 않을 것 같다. 나이나 직책에 관계없이 언제나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고 인간에 대한 예의와 원칙을 지키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사회라면 복잡한 호칭을 대폭 단순화하고, 누구든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고유의 이름으로 불러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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