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맥주를 좋아한다. 커피를 제외하고 내가 마시는 유일한 음료이자 내가 마시는 유일한 술이기도 하다. 단 음식을 싫어해서 콜라나 사이다 주스 같은 것은 거의 입에 대지 않는다. 그래서 피자나 치킨, 특히 전 같은 기름진 음식을 먹을 때에는 반드시 맥주가 필요하다. 마트에서 장을 볼 때 캔맥주 식스팩을 사서 냉장고에 상비해 둔다. 기름진 음식을 먹을 때 맥주가 없으면 낭패이기 때문이다. 가끔은 밤늦게 혼자 영화를 보면서 맥주 한 잔을 음미하기도 한다.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 남편은 내가 밤에 혼자 맥주 마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뭔가 사연이 있어 보여서인지 아니면 내가 키친드링커 kitchen drinker로 발전할까 봐 걱정스러운 건지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꼰대스럽긴 마찬가지다.
한동안 맥주를 사서 숨겨두고 먹었던 때가 있었다. 남편 때문이 아니라 아들 때문이었다. 아들이 19살, 재수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다지 자주 마시지는 않지만, 그래도 집에 맥주가 떨어지지 않도록 나름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맥주를 마시려고 찾아보면 없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여섯 캔 중 대충 절반 정도 남아있으려니 했는데 남은 맥주가 하나도 없어 못내 아쉬운 날도 있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내가 기억을 잘못했나 보다 하고 다시 여섯 캔짜리 한 팩을 사다 다용도실에 채워 두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처럼 맥주를 마시려고 포장되어 있는 팩에서 하나를 꺼내보니 빈 캔이었다. 이상하다 싶어 확인해 보니 남아있는 캔이 모두 비어있었다. 빈 캔을 도로 팩에 끼워놓는 것은 결코 내 방식이 아니었다. 그때에야 비로소 누군가 내 맥주에 손을 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범인은 다름 아닌 재수생인 아들이었다. 처음에는 맥주를 몰래 마시고 빈 캔을 눈에 띄지 않게 처리해서 증거 인멸을 했을 것이다. 그러다 둔감한 엄마가 영 눈치를 못 채자 점점 대담해져서, 굳이 빈 캔을 없애는 수고를 마다하고 도로 팩에 꽂아두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그 일로 아들을 혼내지는 않았다. 혼내지 못했다는 편이 더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잘못하면 술을 두고 모자가 다투는 이상한 그림이 될 것 같기도 했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 딱히 훈계할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기껏 생각해 낸 게 "술 마시면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겠니?" 정도였는데, 내가 생각해도 김 빠진 맥주보다 더 싱거운 얘기였다. 그런 얘기를 한들 아들이 반성을 하지도 사과를 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의례적인 뻔한 얘기를 하는 일에는 영 소질이 없는 나는 침묵하는 편을 택했다. 단지 그 후로 맥주를 사면 아들의 눈에 띄지 않게 검은 봉지에 싸서 냉장고의 야채박스에 넣어 두거나 김치냉장고 깊숙이 숨겨 두곤 했다.
대학생이 되고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게 되자
아들은 더 이상 내 맥주에 손대지 않았다.
오히려 밤에 맥주를 사가지고 와서,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데 같이 보자고 청하기도 하고, 가끔씩 집 근처 치킨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함께 수다를 떨기도 한다. 아들 키운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다.
아들은 나를 닮아 책과 영화를 좋아하고 제 아빠를 닮아, 나를 상대로 이런저런 썰을 푸는 것을 즐긴다. 나는 누구와 대화를 하든 말하기보다는 듣는 편이지만, 이제 남편의 썰은 식상 해서 조금만 길어질 조짐이 보이면 집중하기가 어렵다. 남편의 썰이 길어지면 나는 마음속으로 "거기까지, 거기까지."를 되뇌이며 조바심을 낸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역시나 사방으로 가지를 치며 무성해지고, 나는 행여 그를 격려할까 봐 최대한 리액션을 자제한다. 그러나 아들과 얘기할 때면 더없이 너그럽고 느긋한 마음으로 아들이 하고 싶은 얘기를 마음껏 하도록 묵묵히 들어준다. 적재적소에 추임새를 넣어 주면서.
"엄마,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엄마, 그거 알아?"
"엄마, 진짜 재밌는 얘기 해줄까?"
읽고 있는 책이야기, 좋아하는 영화와 음악 이야기, 정치 이야기, 다양한 지인들에 대한 이야기, 인간과 삶에 대한 이야기, 요즘 무슨 생각에 열중해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 등등
그야말로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장르와 시대를 넘나들며 종횡무진 이어지는 아들의 이야기를 안주 삼아 들으며 나는 생각한다. 가능한 오래오래, 아들이 함께 한 잔 하고 싶어 하는 엄마로 남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