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한 혼돈의 공간.
정리를 잘 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이제는 아예 포기해 버린 상태가 되어버려 좁아터진 방 안에 창고와도 같이 옷, 책, 언제 사용했는지 모를 문서들이 쌓여 있다. 몇 년 째 이렇게 방치되어 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이사 한 번 가지 않아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지내온 이 집 안의 공간. 어린 내가 느끼기에도 큰 편은 아니었지만 몸이 커지고 보니 정말 너무나도 좁아터져, 방이라기 보단 창고를
억지로 방으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바로 현관과 이어져 있는 구조 탓에 밖에서 가족들이 TV라도 보고 있을 라 치면 온갖 잡음 때문에 어떤 일을 해도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여기 앉아 그 중요한 시기를 지내왔는지 자신이 새삼 대견하다. 공부를 해야 했던 학창시절과 전공 특성상 방 안에서의 작업이 많던 대학시절을 거쳐 이제 이 방의 책상 위에서 할 일이 거의 없어진 지금, 여전히 방풍경은 엉망인 상태 그대로였다. 책상 위에는 언제 봤었을 지 모를 책들이 쌓여 있고, 서랍이나 책꽂이 역시 먼지가 뽀얗게 앉은, ‘언젠가 다시 열어볼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기억의 저 끝에 간당간당하게 달린 예전의 소품들이 자리하고 있다.
매일 들락날락 거리기는 하지만 한동안 잊고 있었던 내 방의 모든 것들. 나름 ‘기억’이라는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인간이라 자부했지만, 나의 ‘지금’을 살아감에 있어 이것들은 모두 ‘귀찮지만 버리기는 좀 껄끄러운 짐’들일 뿐이었지 모른다. 변하지 않은 이 방에서 나란 존재는 ‘아이’에서 ‘어른’으로 변하는 과정을 겪었다. 이 방의 밖에서는 많은 일들이,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도 인연을 맺어 왔다. 사회적으로, 물리적으로도 나의 위치는 달라져갔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음 역시도 내 나름의 어떤 정의가 내려지기 시작했다. 그 변화의 기록들, 그것을 기억하고 증명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했었을 이 방의 모든 것들일 것이다.
무슨 바람이 분 것인지 오래간만에 책상에 앉아 ‘현재’를 위한 어떤 작업을 하기 위해 마음을 먹고 책상 주변과 좁아터진 방안을 정리했다. 물론 처음부터 목적은 방의 정리가 아닌, 잡것들로 가득 쌓인 책상에 작업을 위한 공간 확보였을 뿐이었다. ‘지금’의 나에게 있어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언젠가 다시 열어볼 것”의 목록에라도 들어갈 만한 것들인지를 판별하여 분류하는 작업. 여기서는 신중하게 기억의 순위를 정해야만 했다. 내 방에 있었기에 물론 내 과거를 증명하는 모든 것들이었지만, 이제는 놓아주어야 할 과거의 것들을 골라 내 방과는 작별을 하게 해야만 한다. 순위권 밖으로 밀려난 잡동사니들은 이 방과 함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 뻔할 테니. 잡스러운 물건들을 솎아 내고 솎아 내고... 대체 얼마나 오랜 기간을 방치해 두었던 것 인지 본격적인 정리가 아님에도 시간이 꽤나 걸린다. 그 기간을 함께 해왔을 먼지들을 맡아가며 한창 여기저기 꺼내어진 잡것들에 더한 혼돈을 맞이할 즈음, 뚜껑부분이 부서져 있는 플라스틱 파일박스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뭐지 이건?’
상자를 열어보았다. 요즘은 보기도 힘든 손 편지들...
내가 초등학교시절부터 누군가에게 받았던 손 편지들을 모아 두었던 파일박스가 아닌가.
이렇게나 소중한 물건을 고작 이런 먼지구덩이 속에서 발견해 내다니...
대학합격 축하편지, 크리스마스 편지, 생일 축하편지, 늦게 군대 갔던 친구들이 외로움에 치를 떨며 보냈던 편지들, 삐뚤빼뚤한 악필의 친구들이 써 준 편지, 거기에 볼펜으로 쓰다 실수해 수정한 흔적, 돌아가신 큰아버지가 한지에 멋지게 붓 펜으로 써주신 글귀 등...오직 나만의 시간을 기록하고 있는 이 보물들을...
물론 오늘 정리를 결심하게 되어 이 기억과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전혀 의도 되지 않은 ‘우연’에 불과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다시금 소환 되어 진 옛 기억에 머금어 지는 미소 역시 의도하던 바는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기억의 힘...! 그리고 편지들의 맨 안쪽에, 지금은 그다지 볼일이 없을 필름카메라로 인화한 사진 몇 장이 봉투에 들어있었다.
나의 첫 사랑의 사진...!
스멀스멀... 이미 미소가 번진 만면에 새로운 느낌을 더한 미소가 덧대어졌다.
대학입시를 위해 미술학원을 다니던 시절, 늦은 나의 첫사랑은 같은 학원의 누나였다. 서로 응원해주며 선물을 해주고 했었던 기억들. 고등학교 축제에 초대하려 떨림 가득한 전화를 하던 기억과 축제에 찾아와 준 것만도 고마운데, 뜻하지 않게 편지와 선물을 가져와 주었던 이제는 ‘그녀’라고 불러야 할...나의 18살 시절의 첫 사랑. 그녀의 이미지를 다시 확인했을 뿐인데, 그녀와의 기억이 명확하게 되살아났다.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아니, 불과 몇 분전까지만 해도 예상치 못한 기억이었다. 사진을 찍고 간직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던 그때의 감정들까지 모두 되살아났다. 영영 잊고 살게 될 줄 알았다. 남들보다 많이 어수룩함에 그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감정 이외에 다른 행동이라면 어떻게 취해야 하는 지조차 몰랐던 그 시절. 그녀도 많이 변해 있겠지. 나이도 있는데 누군가의 색시가 되어 있겠지. 아마도.
현재를 위한 작업으로 정리를 시작했지만 쏟아져 나오는 과거 이미지들의 회상으로 이 날의 작업은 미루어 질 수밖에 없었다. 고로 내 방의 혼돈은 여전히 유효하다. 가끔씩 기억을 소환하는 작업을 위해서라도 이 혼돈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하는, 말도 되지도 않는 변명으로 오늘도 내일도 정리를 미룰 것이므로...